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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흑인 배우는 미국 흑인을 연기할 수 없다?

지난 달, 인종 문제를 다룬 호러 영화 “겟아웃”의 캐스팅과 관련한 유명배우 사무엘 잭슨의 발언으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출신의 다니엘 칼루야가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것을 두고 영국에서는 인종 간 연애의 역사도 길지 않냐며 “인종차별을 절실하게 느낀 미국 국적의 형제가 이 역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영국의 흑인들이 직면하는 차별과 편견이 미국의 그것보다 덜 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고, 헐리우드에서 흑인 배우로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잭슨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인종 문제에 있어 미국과 영국의 역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제와 짐 크로우 법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정부와 권력 기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고, 이러한 정서는 계속된 경찰 폭력으로 더욱 강화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영국의 흑인들은 노예제의 역사에 다소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카리브해 지역 출신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2차대전에서 영국을 위해 싸우다가 종전 후 영국으로 들어왔음에도 적응이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영국에서 태어나도 영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반이민 정서가 여전하죠.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이 미국만큼 화제는 아니지만,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데이비드 헤어우드, 데이비드 오옐로워, 이드리스 엘바와 같은 배우들이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인종 문제로 고통받는 캐릭터를 두루 연기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닙니다. 영국 국적의 헤어우드는 오히려 인종 문제의 현실이나 역사책 속 내용에 영향받지 않고 대본에 나온대로 연기할 수 있으니 자신의 국적이 미국 영화에 출연할 때 오히려 이점이 될 수도 있다고 언급한 바 있죠. 영미의 영화와 드라마판을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엘바 역시 얼마든지 다양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런던 동부의 노동 계급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보낸 엘바의 어린 시절 상황이 미국 동년배 흑인들보다 훨씬 나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칼루야 역시 “겟아웃”에서 미묘하고도 교활한 인종차별의 피해자를 설득력있게 그려냈습니다. “이 역할을 맡기 위해 내가 흑인으로서 경험한 트라우마를 공개적으로 털어놓았다”고 직접 밝힌 적도 있죠. 그는 “내가 흑인임을 증명해야 한다니 유감”이라며 사무엘 잭슨이 말한 영국 흑인 대 미국 흑인의 이분법을 반박했습니다.

이번 논란이 아예 놓치고 있는 점도 하나 있습니다. 잭슨은 마치 배우의 실제 경험과 연기 사이에 중요한 상관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말했지만, 배우가 어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기 위해 꼭 실제로 비슷한 경험을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의 연기는 연기 자체로 평가해야지, 그의 배경이나 국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최근 영국 배우들이 헐리우드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이들의 연기력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겟아웃”의 감독 역시 칼루야를 캐스팅 한 것은 그가 오디션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지금은 흑인들끼리 국적으로 편을 갈라 싸우기보다는 흑인들의 경험을 더 많이 스크린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할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 국의 흑인 배우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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