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라던 20세기 후반 영국에서 지능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능을 가지려 노력했고, 이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이의 지능이 측정되었다는 것입니다. 11살이 되면, 전국의 학생 수만 명이 11-플러스라는 IQ 테스트를 받기 위해 책상들이 늘어선 강당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 짧은 몇 시간 동안의 시험 결과로 누가 대학을 진학해 전문직을 얻을 수 있는 문법학교로 가게 될지, 기술학교로 진학해 기술을 배울지, 그리고 저소득 노동자가 될 신중등학교(secondary modern school)로 가게 될지 결정되었습니다.
지능이 마치 혈압이나 신발 크기처럼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능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의 철학에서 영국의 총리 테라사 메이에 이르기까지 운명의 붉은 줄을 통해 서양의 지성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군가가 지적이거나 지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이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됩니다. 즉, 지능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때로, 지능을 이용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아무나 의사와 기술자, 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점 또한 존재합니다. 지능, 혹은 지능의 부재는 그가 무엇을 해도 되는지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할 수 있는지 또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역사는 바로 덜 지적인 이들을 식민지로 삼고, 노예로 사용하고, 불임 수술을 가하고 살해한 역사입니다. (다른 동물을 포함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먹기까지 하지요)
지능의 역사는 오래전, 고대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21세기 인공지능의 등장과 이에 대한 반응에서 이런 지능에 대한 태도는 흥미로운 특징을 드러냅니다. 최근 인공지능은 크게 발전했고 많은 전문가는 그 발전의 속도가 더 빨라질 것으로 예측합니다. 여러 현자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트위터 피드에 터미네이터를 언급하며 흥분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지능, 특히 지배의 근거로서 지능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권 철학자들은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 자체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서양 철학의 역사에 중요한 독일 철학자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철학자들이 지능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지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능의 일부인 이성(reason) 혹은 합리성(rationality)에 천착했습니다. ‘지능’은 그것이 자신의 영역이라 주장한 신학문, 곧 심리학이 등장할 때까지는 이 자신의 오랜 친척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비록 오늘날 많은 학자가 지능의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하지만, 이성은 여전히 지능의 핵심으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나는 지능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지능의 개념적 조상까지 포함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 시작은 플라톤입니다. 그는 모든 저작에서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은 신화와 신비주의의 세상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곧 이성적 사고 – 오늘날 우리가 지능이라 할 수 있는 -를 통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공화국(The Republic)”에서 이상적인 지배자는 ‘철학자 군주(the philosopher king)’이며 이는 철학자만이 만물의 정당한 우선순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그는 가장 현명한 이가 다른 이를 지배해야 한다는, 곧 지능에 기반을 둔 능력주의(intellectual meritocracy)를 주장합니다.
당시 이 생각은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이미 인민의 뜻을 따르는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인민(people)’이 되기 위해서는 지능과는 무관하게 남자 시민이어야 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핏줄에 기반을 둔 귀족정치(aristocracy), 신성에 기반을 둔 신정(theocracy), 힘에 기반을 둔 폭정(tyranny)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지식인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그중에는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실용적인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이성의 탁월함을 이용해 그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연 사회의 위계를 설명했습니다. 그의 책 “정치(The Politics)”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나뉘는 것은 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적절한 일이다. 날 때부터 어떤 이는 지배받도록, 어떤 이는 지배하도록 태어난다.’ 지배자의 특징은 ‘이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느냐입니다. 교육받은 남성이 그러하며, 따라서 여성, 그리고 ‘주로 몸을 이용해 일하며, 따라서 날 때부터 노예인’ 남성을 지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다리 아래에는 다른 동물들이 있으며 이들의 지능은 너무 낮아서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그들에게도 더 나은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서양 철학의 시작부터 지능은 교육받은 유럽인 남성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여성을, 하층 계급을, 비문명화된 사람들과 동물을 지배하는 논리가 탄생했습니다. 플라톤은 이성의 우수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두었지만, 한 세대 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는 남성의 지배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2000년 동안 이런 사고방식이 지속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호주의 철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밸 플럼우드(Val Plumwood)는 그리스 철학의 거인들은 우리의 생각에 아직도 영향을 미치는 이원론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똑똑한/멍청한, 이성적인/감정적인, 정신/신체가 각각 연결되어 있으며, 이 이원론은 은연중에, 혹은 명시적으로 남성/여성, 문명화된/원시적인, 인간/동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원론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것처럼, 지배하는/종속되는 또는 주인/노예의 이원론과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나 노예제도와 같은 지배 관계가 자연의 질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졌습니다.
(AEON)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가 "진보 진영의 잘난 척"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다줄 수 있다는…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미국 대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선거 결과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려운 팽팽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히…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