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운동에 가하는 반격의 메시지로 라틴어 문구는 대개 효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21일, 전날 열린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인 반트럼프 시위 여성행진 참가자들 사이에서 손으로 쓴 라틴어 문구가 적힌 팻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Primum Non Nocere”, “프리뭄 논 노체레”. “무엇보다 해를 입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래된 의학 전통과 관련된 말이기도 합니다. 이 팻말을 들고 온 보스턴 출신 역학자는 마이크 길버트 씨였습니다. 전 세계 수백 개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된 여성행진에 여성이 아닌데도 기꺼이 참가한 이유로 길버트 씨는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우선 자신의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여성들과의 연대를 표하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이유는 과학계에 대한 모든 지원과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정권에 참여하게 되면서 건전한 과학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여성행진 참가자 중에는 트럼프가 어떤 여자와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걸 아쉬워하듯 자랑하던 천박한 음담패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트럼프가 그 여성의 성기를 만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떠벌리듯 한 걸 빗대어 여성행진 참가자 중에는 역으로 여성의 성기를 형상화한 모자를 쓰거나 “나의 소중한 그곳이여 영원하라(Viva La Vulva)!” 같은 문구를 써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트럼프를 그저 천박한 외국인 혐오주의자라고 조롱하며 “어차피 손이 너무 작아서 국경에 장벽을 치지도 못할걸(Can’t Build A Wall, Hands Too Small)”이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옮긴이: 손이 작다는 말은 깊이가 없고 천박하다는 뜻도 있지만, 공화당 경선 기간 이슈가 됐던 트럼프의 성기 크기를 빗대어 조롱하는 뜻도 있습니다) 대부분 참가자는 수많은 사람이 미국 전역에 모여 분명한 반대 의사를 나타낸 데 무엇보다 의의를 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식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주장했다가 사실이 아니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니, 어느 정도 작전이 성공하기도 한 셈입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좌파용 티파티” 운동을 펴기에 알맞은 시기라는 말도 나옵니다. “허브티파티(Herbal Tea Party)”라고도 불리는 티파티 좌파 버전은 전체 득표에서 패하고도 당선된 대통령 트럼프의 정당성을 최대한 문제 삼으며 트럼프 정권이 내놓는 정책에 사사건건 저항하는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신중론도 없지 않습니다. 클린턴이 트럼프보다 총 290만 표 정도를 더 받은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2012년 대선과 비교했을 때 클린턴이 오바마보다 표를 덜 받은 주가 34개나 된다는 것도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클린턴은 특히 캘리포니아나 뉴욕, 매사추세츠 등 확실한 승리가 점쳐지던 표밭에서는 압승을 거뒀지만, 백인, 서민 노동자 계급,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13개 경합주(swing states)에서 패했습니다.
전체 50개 주 가운데 공화당 주지사가 33명, 공화당이 주의회의 다수당인 곳이 32곳입니다. 스칼리아 대법관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대법관 한 자리는 곧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으로 채워집니다. 입법, 사법, 행정 등 연방정부 권력의 삼부가 모두 공화당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1920년대 이후 가장 궁지에 몰린 민주당으로선 다시 유권자의 선택을 받고 집권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 의견을 모으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낙태나 기후변화 같은 사안에서 민주당의 당론이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들을 끌어안고 설득할 것이냐, 아니면 어차피 구제 불능인 사람들이라며 그냥 무시하고 갈 길을 갈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쿡 정치 보고서(Cook Political Report)의 애널리스트 데이비드 와서만은 몇 년 전 어느 지역의 정치적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 몇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가능한 지표였습니다. 주민들이 타는 자동차 브랜드도 유용한 지표였지만, 그 지역에 값비싼 유기농 토마토, 글루틴프리 강아지 사료 등 고급 신선 제품을 파는 홀푸즈 같은 마트가 있는지, 아니면 시골풍, 주로 남부 지역 손님들에게 가정식을 파는 크래커배럴 같은 식당 가맹점이 있는 곳인지도 정치 성향을 뚜렷하게 나누는 지표였습니다. 홀푸즈 대 크래커배럴로 단순화해서 미국 전역의 카운티를 분류했을 때 트럼프는 크래커배럴 카운티의 76%, 홀푸즈 카운티의 22%에서 승리했습니다. 54%라는 차이는 역대 어느 대통령에게서도 발견된 적 없는 큰 차이입니다. 2000년 조지 W. 부시가 당선됐을 때 이 수치는 31%,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됐을 때는 43%였습니다.
결국, 트럼프에 맞서는 이들은 누구든 이 홀푸즈와 크래커배럴의 간극을 그대로 안은 채로 싸워도 괜찮을지, 아니면 이 틈을 좁히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서는 트럼프를 넘기 어려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좌파, 중도 좌파, 민주당 지지자를 모두 아우르는 미국의 리버럴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이 트럼프를 뽑은 사람 이야기만 나오면 거의 두드러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4년 전이나 8년 전에 오바마를 뽑았다가 이번에는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도 리버럴은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 혹은 구제 불능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이번에 트럼프를 뽑은 사람 중에 전에 오바마를 뽑은 적이 있는 유권자의 숫자는 수백만에 달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날 취재차 트럼프를 뽑았다는 유권자와 함께 워싱턴DC 지하철을 탔는데, 옆에 앉은 힙스터스러운 시위대로 보이는 사람이 옷에 “트럼프는 성기가 작대요”라고 쓰여 있는 배지를 달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상대방을 설득하기는커녕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기도 어려울 겁니다. 이튿날 여성행진에 참여한 이들 사이에는 민주당이 미국 정치의 주류라는 틀림없는 사실을 확실히 못 박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습니다. 트럼프를 뽑은 사람은 멍청하다는 전제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문구들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예를 들어 “Make America Think Again” 같은 것이죠. (옮긴이: 트럼프 후보의 선거 구호였던 “Make America Great Again”을 패러디한 것으로 “미국인들이여, 다시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삽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구호. 얼마나 생각이 없거나 모자라면 트럼프에게 표를 줘서 이 지경이 되었냐는 핀잔을 전제한 문구라는 것이 Economist의 지적)
사실 민주당원과 리버럴들은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덮어놓고 하나같이 멍청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하기엔 트럼프를 뽑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캐나다 앨버타에서 미국 텍사스까지 송유관을 건설하는 사업인 키스톤XL을 예로 들어봅시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키스톤XL에 반대합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거부권을 행사했었죠.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 명령으로 키스톤XL을 재개하겠다고 공약했고, 곧 이를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사고로 기름이 유출될 때 일어날 수 있는 환경 재앙을 우려하며, 화석에너지 대신 친환경 재생 에너지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타당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키스톤XL 같은 에너지, 건설 사업을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힌 정책이라고 비난할 때 주로 문제 삼는 지점, 즉 송유관 건설 사업을 해봤자 일시적으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조금 늘어나는 게 전부라는 접근은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당 소속의 텍사스 주 댈러스-포트워스 지역구 출신 하원의원 마크 비지는 선거가 끝난 뒤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바로 그 일시적인 건설직 비정규직 일자리 덕분에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느끼기에 민주당은 자신들에게 관심 없는 정당입니다.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 엘파소 지역구 출신 하원의원 베토 오루케는 2016년 민주당의 대선 전략이 기본적으로 트럼프가 “나쁜 놈”이라는 걸 부각하는 데 집중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텍사스에 있는 친구 중 트럼프가 나쁜 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트럼프는 싫지만, 국경을 따라 장벽을 세운다거나 제조업 일자리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겠다는 약속 등 트럼프가 내세운 정책은 상대적으로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명확한 메시지조차 던지지 못했습니다. 오루케 의원은 2018년 중간선거에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자리에 도전장을 던질 예정입니다. 그런 오루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티파티 식으로 무조건 반대를 외쳐야 한다고 믿는 동료 민주당원들 일부의 신념입니다. 오루케는 대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는 민주당원이라면 정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정권을 끝없이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건 결국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유권자를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표를 행사한 유권자들은 다른 모든 선출직을 뽑는 유권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는 트럼프의 손이 작다는 부류의 농담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캅타티오 베네볼렌티아에(Captatio benevolentiae). 로마 시대 웅변가들은 “토론에서 이기려면 먼저 청중들의 호의를 얻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함의를 던지는 또 다른 라틴어 문구입니다. (이코노미스트)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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