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뉴욕타임스 뉴스 분석 코너에 지난 25일 소개된 이 기사의 원문 제목은 “In a Swirl of ‘Untruths’ and ‘Falsehoods,’ Calling a Lie a Lie”, 우리말로 의역하면 “거짓말의 범람, 달리 포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언론” 정도가 됩니다. 전문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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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선택은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한 순간부터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 파급 효과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 말과 결정이 잇달아 나오는 사이 시민들은 각각의 발언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분석할 틈도 없었다. 정직하지 않은 언론과의 전쟁 선포, 오바마케어 폐지, 멕시코와의 국경에 공약대로 장벽을 쌓아 올리겠다는 선언 등이 모두 취임 첫 주에 속전속결로 튀어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당선 직후 했던 주장을 취임한 뒤에도 계속 되풀이했다. 바로 자신이 전체 득표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패한 이유가 투표권이 없는 불법 체류 이민자 수백만 명이 투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사실이라면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대통령의 주장은 상상의 동물 유니콘 수백만 마리가 법망을 피해 투표했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뱉은 근거 없는 주장을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를 두고 큰 고민에 빠졌다. 물건만 팔 수 있다면 부풀려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 돈밖에 모르는 사업가 같은 태도에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은 “가짜 뉴스”라고 깎아내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이 고민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을 표현하는 단어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단어를 골라야 한다. UC버클리의 언어학자 제프리 눈버그는 진실하지 않은 말을 표현하는 단어가 근거 없는(baseless), 가짜의(bogus), 거짓말(lies), 허위(untruths) 등 상당히 많다고 지적한다.
대통령의 행실을 표현하는 언어로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지만, 거짓말을 뜻하는 단어들이 적절한 상황은 무척 드문 일이다. 물론 역대 대통령 중에 백악관 인턴과 섹스한 적 없다고 말한 빌 클린턴처럼 거짓말로 곤욕을 치른 이가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버드 니먼 언론재단의 조슈아 벤튼 소장은 지금 상황이 언론에는 물론이고 국가 전체로 봐도 대단히 특이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정권은 다양한 사실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어떤 주장을 내놓을 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좀처럼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대한 언론의 묘사는 대체로 조심스럽다. 눈버그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5년 전만 해도 전혀 쓰인 적 없던 어휘가 매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어요. 언론은 지금 거짓을 거짓이라 쓰지 못했다가 치르게 될지 모르는 대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대통령의 발언이 거짓말이고 근거가 없고, 근거로 든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라는 팩트는 확인이 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지 주저하고 있는 거죠.”
몇몇 언론은 근거나 주장이 잘못됐다는 뜻으로 “falsely” 혹은 “wrongly” 같은 단어를 썼다. 이런 부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다. “주장에 근거를 들지 않았다”며 “with no evidence”나 “won’t provide any proof”라고 쓰거나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unverified claims”, “repeats debunked claim” 같은 표현을 쓴 언론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마침내 더 확실한 단어를 채택했다. 기사 제목에 “거짓말(lie)”이란 단어를 명시한 것이다. 온라인판 기사에서 먼저 “falsely”라고 쓰던 표현을 “lie”로 바꾼 뒤 화요일자 종이 지면의 제목에도 “거짓말”을 명시했다. 해당 기사의 제목은 “Meeting With Top Lawmakers, Trump Repeats an Election Lie”였다. (“트럼프 대통령,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선거 관련 거짓말 거듭 반복”)
이 단어 선택을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거짓말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 때문이다. 동시에 “lie”는 거짓과 관련된 수많은 어휘 중에 특히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NBC의 시사 프로그램 “Meet the Press”를 진행하는 척 토드가 프로그램에 출연한 트럼프의 참모 켈리안 콘웨이가 “대안적 사실” 운운하며 거짓말을 포장하려 했을 때 이를 꼬집으며 썼던 단어 “falsehood”와의 뉘앙스 차이만 보더라도 “lie”의 특별한 위상을 알 수 있다.
누군가 “거짓말을 했다”고 “lie”를 동사로 쓰든, 그보다는 조금 수위를 낮춰 명사로 쓰든 “lie”를 쓰면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구를 속이려는 의도로 말을 꾸몄다는 뜻이 된다. 눈버그 교수는 “lie”는 거짓말을 한 사람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 즉 불순한 의도에 대한 규탄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과연 트럼프는 어떤 의도로 거짓말을 하는 건지 NPR이 분석을 내놓았다. 트럼프는 9.11 테러가 났을 때 강 건너 저지 시티에서 수천 명이 붕괴하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자기가 직접 봤다고 말했다. 자신과 정보기관 사이를 언론이 이간질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언론은 정보기관을 나치 독일에 비유한 트럼프 본인의 트윗을 인용해 보도했을 뿐이다.
NPR 아침 뉴스를 진행하는 메리 루이스 켈리는 “lie”란 단어의 정의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먼저 옥스포드 영어 사전을 찾아봤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속이려는 의도로 만들어낸 거짓 진술. 거짓말의 정의에서 핵심 단어는 ‘의도’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머릿속에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으니 실제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한 말을 두고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뿐이죠.”
NPR 보도부문 사장인 마이클 오레스케스는 루이스 켈리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오레스케스는 NPR 웹사이트에 게재한 글에서 “어떤 사안이나 인물에 ‘거짓’이라는 딱지를 직접 붙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하게 된다.”고 썼다. 오레스케스는 또 중립을 지켜야 하는 언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한쪽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 편집국도 비슷한 고민을 거쳤다. 이미 선거 기간 중 한 차례 트럼프에게 “Lie”라는 단어를 쓸지 말지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오가기도 했다.
앞선 9월, 당시 트럼프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에서 태어난 게 맞다.”고 발표했다. 이미 사실 여부는 밝혀진 지 오래고, 대다수 미국인이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문제에 관한 공식적인 의견을 내놓기를 계속 거부하며 에둘러 딴지를 걸다가 마지못해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다음 날 1면 기사 제목은 “거짓말은 물렀지만, 뉘우치지 않는 트럼프(Trump Gives Up a Lie but Refused to Repent)”였다.
뉴욕타임스 편집국장 딘 바켓은 트럼프의 최근 발언을 편집국 기자들이 정리해 보낸 메시지를 받고, 편집국의 다른 선임 기자들과 상의한 끝에 “Lie”란 단어를 써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두 달 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소통 창구 트위터를 통해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한 게 다가 아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투표한 표 수백만 표를 제하고 나면 전체 득표에서도 내가 승리했다.”는 주장이 그대로 되풀이됐다는 건 의도가 확실하다는 방증이라고 바켓 국장은 판단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winning in a landslide)했다고 표현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선거인단 득표수에서도 이번 대선은 경쟁이 치열했던 편에 속한다.)
바켓 국장도 특히 일반 시민도 아닌 대통령에게 “Lie”라는 단어를 쓰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무게감과 파급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단어를 너무 자주 쓰지는 말라고 당부했는데, 이 단어에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어서이기도 하고 너무 자주 쓰다 보면 그 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언론이 책임지고 알려야 할 책무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알려야 한다는 책무였죠. 트럼프 대통령은 (부정 선거가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어요. 선거 제도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엄청난 발언을 유력 후보 시절에 하고, 당선자 신분으로 또 한 겁니다.”
바켓 국장은 그러면서 “Lie”란 단어를 쓴 데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찬반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 니먼 재단의 벤튼 소장은 뉴욕타임스가 “Lie”를 쓰되 동사보다 의미가 덜 직접적인 명사로 쓴 것을 두고 신중한 판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는 트럼프 행정부와 주류 언론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 직결되는 문제다.
위기 단계의 소통 전문가인 사라 브래디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라고 진단했다. 브래디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과 주류 언론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고 말한다.
“대부분 언론은 이미 대통령과 첨예하게 각을 세우고 있어요.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이 어떤 식으로든 검증되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은 도대체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언론이 대통령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처럼 비친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결국, 단어 선택이 중요하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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