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 전 해리 리드 상원의원은 “언론이 정직하게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언행은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거론되어 왔습니다. 언론도 끊임없이 이런 내용의 기사를 생산해왔죠.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를 비롯해 혼란에 빠진 해안지역 엘리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분석을 내놨습니다. 우선, 미국 사회가 실제로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사회라 사람들이 트럼프가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오히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여러 미국인들에게 생각대로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요.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오바마를 뽑았던 미국 국민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쩌면 인종주의보다 성차별주의가 더 극심한 것일 수도 있죠. 클린턴을 뽑느니 차라리 트럼프를 뽑겠다고 선택한 것이니까요. 트럼프의 여성혐오적 언행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표를 몰아준 백인 여성들을 탓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설명은 사람들이 정말로 트럼프가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우선 저는 인종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종주의자”가 치명적인 낙인이 되려면 인종주의자가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미국 사회가 어느 정도의 합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선 결과를 보고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종주의의 정의에 대한 합의 부족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드러났습니다. 트럼프는 출마를 선언하던 날부터 대놓고 “멕시코인들은 마약을 가져오고, 범죄를 저지른다, 강간범이다, 그 중에는 물론 선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인종주의자”라는 공식 라벨을 붙일 수 있는지 여부는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지지자들은 그가 그저 “부주의하고 훈련이 덜 되어있을 뿐”이라고 변호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인종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썼습니다. 상대인 클린턴조차도 “인종주의자”라는 표현이 부담스러운 듯 그의 “매우 공격적인 수사”를 비난하면서도, 국민들이 각자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죠.
하지만 이 논쟁은 지난 6월 이후 클린턴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막을 내렸습니다. 트럼프가 자신이 연루된 사건을 맡은 인디애나 주 출신의 연방 판사에게 “멕시코인이기 때문에”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허핑턴포스트, 슬레이트, 뉴스위크 등 여러 매체가 트럼프의 인종주의를 확신하는 헤드라인을 달았죠. CNN 인터뷰에서 진행자는 트럼프에게 “어떤 사람이 인종 때문에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주장, 이것이 바로 인종주의의 정의 아닌가요?”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죠. 하지만 트럼프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고 저는 그 점을 존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즉, 인종 때문에 그가 열등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자신의 인종 때문에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는 주장이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적어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트럼프가 인종주의자라는 합의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판사에 대한 트럼프의 언급이 “교과서적인 인종주의 발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표현은 의미심장했습니다. 트럼프의 말이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종주의, 학술적인 의미에서 인종주의에 해당한다는 뜻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전에 등장하는 1번 정의(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해당하지 않으니까요.
1920년대 인종주의가 사회 문제로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인종 문제란 명백한 백인에 의한 지배였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보다 미묘한 차별과 착취, 불평등을 포괄하기 시작했죠. 또한 구성원 개개인이 인종주의자가 아니어도, 사회나 체제가 인종주의적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학자들은 개념을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이제는 개인도 미묘하게, 구조적으로 인종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죠. 즉, 백인우월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나 자신도 모르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 같이 폭넓은 인종주의의 개념은 좌파와 학계에서 각광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개인을 악마화시키지 않고 경찰 폭력과 같은 사회 문제를 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인종과 관련된 지속적인 불의에 눈을 뜰 수 있게 되었고 해결책을 논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이와 같은 “교과서적 정의”는 전통적인 사전적 개념과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에 사회학자 패트릭 포셔가 지난 25년 간 가장 많이 인용된 편견 관련 논문들을 조사했더니, 대부분은 편견을 악의적이고 노골적인 것이 아닌, 무의식적이고 내재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의적인 감정, 혐오 범죄의 동기가 되는 것으로서의 인종주의와 학계에서 다루는 개념에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죠. 포셔는 이런 경향으로 인해 연구자들이 연구 결과를 대중과 소통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2016년 대선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수 많은 언론인과 폴 라이언이 트럼프를 교과서적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할 때, 수 백만 미국 대중은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자신이 아는 인종주의의 정의에 따르면, 트럼프는 인종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죠. 이 간극은 TV 토론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사회자가 두 후보에게 인종 문제 해소를 위해 무엇을 하겠냐고 묻자 트럼프는 예의 다듬어지지 않은 답변을 내어놓았습니다. 경찰력을 강화하고 도심 지역을 잘 보호하겠다는 내용이었죠. 반면 클린턴은 “사법 체계에 있어 구조적인 인종주의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내재적 편견은 경찰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답했습니다. 대선 후보가 이런 개념들을 직접 언급했다는 사실에 사법 개혁 활동가들은 기뻐했지만, 시청자들이 클린턴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선거 운동 기간 막바지에 트럼프가 성추행을 자백한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트럼프가 스스로 여성혐오자, 나아가 성범죄자임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대선 레이스도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죠. 이걸 보고도 트럼프에 표를 줄 여성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설문조사 결과는 달랐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이 영상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죠.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여성의 경우, 절반 이상이 영상 속 트럼프의 말은 혐오 발언이 아니라 무해한 “락커룸 대화”로 여긴다고 답했습니다.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연구는 2009년 예일대에서 나왔습니다. 연구자는 1500명의 대상자에게 한 강간 사건의 세부 사항과 성폭행의 법적 정의를 제시하고, 가해자의 유죄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대상자들은 유죄 여부 결정에 있어 법적 정의보다는 자신의 문화적 배경(진보, 보수 등)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죠.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의 분열은 매우 명백했습니다. 법적인 기준이 있어도 강간의 정의에 대한 합의에 이르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정의도 이렇게 사람마다 달랐고, 누군가는 명백히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행동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앗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종주의적, 여성혐오적 트럼프 캠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트럼프에게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면, 그가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극소수의 광신도들을 빼고는 모두 지지를 접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라벨 자체가 얼마나 모호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개념에 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낙인 효과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여성, 흑인, 무슬림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슬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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