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 재향군인회(Veterans Administration)는 기억상실증이나 주변의 자극에 지나치게 깜짝 놀라는 경악 반사, 지속적인 악몽과 불면증, 두통, 집중력 부족 등의 증세가 고문이나 가혹 행위 때문에 생겼을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칠레 등 다른 나라의 고문 피해자를 추적한 연구에서도 피해자들이 비슷한 증세를 호소했습니다. 미국 의사들은 참전군인들 가운데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을 치료할 때 외국의 연구 사례를 참조합니다.
9.11 이후 심문 규정을 개정하는 것과 관련한 논의에서 CIA의 수석변호사였던 존 리조는 만성 정신 질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문제를 당시 더 비중 있게 다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기적인 정신 질환 문제는 사실 한 번도 제대로 논의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습니다.”
미국 정부는 새로운 연구 대신 미군 훈련소 교범에 나온 적군에 포로로 잡혔을 때의 원칙을 토대로 규정을 정했습니다. 미군은 훈련병들을 상대로 통제된 환경에서 한 실험을 토대로 잠을 못 자게 하거나 굶기고 옷을 벗겨 수치심을 주는 행위가 정신 질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 전제로 미군에게 교육하는 규정이 “SERE”라 불리는 원칙으로, 살아남아서(Survival), 정보를 발설하지 않고(Evasion), 저항하고(Resistance), 도주하라(Escape)는 것입니다.
CIA와 국방부가 고문 전략을 짜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건 심리학자 제임스 미첼과 브루스 젠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1960년대 말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주창한 유명한 “학습된 무기력 이론”을 내세워 심문을 정당화했습니다. 셀리그만은 실험 대상으로 삼은 개들에 일정한 전기 충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개들이 전기 충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때 저항을 멈춘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저항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을 깨달으면 포로도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진 끝에 기밀을 털어놓을 것이라는 논리가 탄생합니다.
국제법은 물론 미국 국내법으로도 고문은 불법이었지만, 미국 법무부는 미첼과 젠센이 고안한 논리를 토대로 한 심문 방법은 고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러한 심문 방법이 장기적인 정신 질환이나 상처를 남긴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내용의 법무부 내부 문서가 공개됐습니다.
CIA 수석변호사였던 존 리조는 당시 미국 정부는 반론을 검토할 겨를이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9.11 이후) 후속 테러가 일어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모든 정보를 캐내어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차단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정부는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부작용에는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어요. 어떻게 해서든 적들의 실토를 받아내고 작전을 수행해야 했으니까요.”
테러와의 전쟁에 모두가 몰두한 사이 셀리그만의 실험에 쓰인 개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사실 그 개들은 전부 유기견이었습니다. 실험이 끝난 뒤에는 모두 안락사시켰습니다.
미국인들이 언제부터 그에게 차디찬 얼음물을 부어댔는지 모하메드 벤 서우드 씨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가 붙잡혀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CIA 비밀감옥은 온종일 캄캄했습니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밤낮을 분간할 수도, 날짜를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비밀감옥은 염전(Salt Pit)이라고도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물 끼얹기(water dousing)”. 얼음물 세례를 미국 교도관들은 그렇게 묘사했습니다. 알고 보면 대단히 잔혹한 고문임에도 그저 물을 끼얹는 것에 불과하다고 포장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옷을 발가벗겨진 채 비닐 방수포 하나만 쓰고 손은 머리 위에 족쇄를 채워 묶인 채, 가끔은 복면을 씌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한 채로 물벼락을 맞았다고 벤 서우드 씨는 법정에서 진술했습니다. 교도관들이 방수포 한쪽을 들어 올리면 CIA 관료 한 명이 얼음물을 들이붓곤 했습니다. 물에 잠겨 숨이 쉴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이런 고문을 받았습니다.
벤 서우드 씨는 CIA가 아프가니스탄, 태국,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운영하던 비밀 감옥에 일찍 수감된 편에 속합니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미국인에게 수도 없이 말했습니다. 자신은 미국의 적이 아니라고. 리비아 출신인 벤 서우드 씨는 1991년 파키스탄으로 건너와 카다피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조직된 이슬람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2003년, 파키스탄과 미국 관리들이 그의 집을 급습해 그를 붙잡아 갔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오사마 빈 라덴이나 다른 알카에다 고위급 인사 두 명을 아느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는 심문 내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2004년 CIA는 벤 서우드 씨를 리비아에 넘겼습니다. 그는 그 뒤로 7년이 지나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석방됐습니다. 벤 서우드 씨와 함께 갇혔던 이들은 카다피 정권의 감옥에서의 처우가 CIA 감옥에서보다 더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47살인 벤 서우드 씨는 이제 자유의 몸이지만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기복에 시달리는 그는 사소한 결정을 내릴 때도 좀처럼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저보고 왜 그렇게 갑자기 화를 내거나 갑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발하는지 물어보곤 해요. 자기들이 뭔가 잘못해서 아빠가 화난 것 아니냐면서요.”
미국 관리들은 그의 손발을 묶은 채 몸을 뒤틀거나 관 만한 크기의, 때로는 그보다 더 작은 상자에 가둬놓았습니다. 벽으로 그를 밀쳐놓고 천장에 달린 쇠사슬로 그를 묶은 뒤 소리가 한없이 울려 퍼지는 좁은 방 안에 시끄러운 록 음악을 틀어놓았습니다.
“그런 끔찍한 기억 때문에 아빠가 가끔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거라고 아이들에게 무슨 수로 설명합니까?”
벤 서우드 씨는 CIA 비밀감옥에 갇혔던 사람 두 명과 함께 CIA 고문 전략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심리학자 미첼과 젠센 박사를 고소했습니다. 법정에서 두 심리학자는 자신들이 고문에 직접 관여한 적도, 어떤 도움을 준 적도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벤 서우드 씨는 CIA가 새로 고안한 강화 심문 기법(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을 적용해 심문했던 수감자로 2014년 상원 정보위원회 보고서에도 등장합니다. 보고서는 강화 심문이 잔인하면서도 원하는 정보를 끌어내는 데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며, 특히 수감자를 심문하는 관리들이 승인되지 않은 방법을 남용해 생기는 부작용에 관해서도 적시하고 있습니다. 살해 위협이나 가족을 해치겠다는 위협, 항문으로 음식을 집어넣는 고문 등 끔찍한 수법이 동원됐다고 보고서는 지적했습니다.
미국 상원은 고문 피해를 본 이들이 그 결과 앓게 될지 모를 정신 질환에 대한 연구나 추가 조처는 따로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밀이 해제된 보고서 요약본에는 수감자 가운데 환각, 환청이나 우울증, 피해망상 등 정신 질환을 앓는 사례가 보고됐다고 쓰여 있습니다. 상원의 진상조사를 이끌었던 전직 FBI 출신 다니엘 존스는 아직 기밀로 남아있는 전체 6천 쪽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상세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CIA에 붙잡혔을 때 그들이 겪었던 일과 현재의 정신 질환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건 보고서를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심문에 나선 관리들은 수감자들의 감각을 최대한 무디게 하고 무기력함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하면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수십 년 전에 밝혀졌지만, CIA는 비밀감옥 운영 방침을 정하고 그대로 집행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확인한 수감자만 적어도 119명. 강제로 이들의 옷을 벗겨 수치심을 주고 감각을 무디게 하려고 끝없이 빛을 쪼이거나 반대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가둬놓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이들 가운데 아직도 자기가 왜 붙잡혔는지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 상원 조사위원회는 (비밀감옥에 갇혔던)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잘못된 정보에 휩쓸려 체포했거나 범죄와 관련이 없던 이들로 처음부터 수감되지 말았어야 하는 피해자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독일 국적의 칼레드 엘 마스리 씨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휴가를 보내던 중 마케도니아 경찰에 붙잡힌 엘 마스리 씨는 CIA 비밀감옥에 수감돼 잦은 구타와 고문을 당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비밀감옥으로 이송된 그를 향한 구타와 고문은 계속됐고, 그는 끝내 기억상실, 우울증, 무기력증 등 많은 정신 질환을 앓게 됩니다.
탄자니아에서 사업을 하던 모하메드 압둘라 살레 알아사드 씨도 CIA에 붙잡혔다 별다른 설명 없이 풀려났습니다. 아사드 씨의 부인 모하메드 씨는 남편이 (CIA에 붙잡혔다가 온 뒤)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전에는 그런 적 없었는데 그렇게 무언가를 자꾸 깜빡깜빡하더라고요. 한참 전화통화를 하다가 정작 지금 누구랑 전화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는 식이었어요. 성격도 바뀌었는데 특히 정말 별것 아닌 일에 정말 크게 화를 내고 주체를 못 하더군요. 전에는 정말 안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너무 우울하다며 혼자 있고 싶다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곤 했어요.”
아사드 씨는 지난 5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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