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큰 이변이 없는 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될 것입니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언론이 트럼프에게 적용하지 말아야 할 잣대를 언급했습니다. 크루그먼이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시사점이 많습니다. 특히 거짓 균형, 혹은 기계적 중립성의 문제는 우리 언론도 새겨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한쪽은 사실을 말하고 다른 쪽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데도 이른바 “논란으로” 처리하고 마는 언론은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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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사이의 대결을 언론은 어떻게 보도할까요? 글쎄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제가 확실히 예측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제 예상대로 된다면 이는 우리 언론이 심각한 문제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 미리 언론이 범할 것으로 예상되는 실수나 잘못을 미리 짚어놓는 것이 잠재적인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나마 피해가 경미할 것부터 짚어볼까요? 먼저 실제보다 선거 양상을 박빙으로 포장하고 싶은 언론의 바람이 실제로 기사에 투영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선거가 박빙일수록 유권자의 관심이 높아지고 그만큼 기사가 잘 팔리더라도 그렇다고 사실을 왜곡해서 판세를 보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공화당 경선도 투표 결과만 놓고 보면 ‘트럼프의 압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선 기간 내내 언론의 보도가 어땠는지는 다들 아시죠? 트럼프가 곧 무너질 것처럼, 선거의 향방은 여전히 안갯속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전문가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완전히 틀린 것으로 판명된 문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론조사 결과도 빠짐없이 등장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완전 엉터리였죠.
하지만 여론조사 역시 전반적으로는 트럼프의 압승을 잘 맞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덟 달 넘도록 트럼프는 여론조사에서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으니까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하는 말이 “여론조사에서 보듯이”가 아니라 “여론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했던 게 결국은 틀렸습니다.
그렇더라도 특히 대세를 거스른 듯한 몇몇 여론조사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아마 조사 대상을 잘못 선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문항이나 답변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결과를 잘못 해석했을 수도 있겠죠. 어쨌든 여러 여론조사가 (지금 클린턴 후보처럼) 대체로 한 후보의 여유 있는 우세를 전망하는데 유독 전혀 다른 상황을 예측하는 여론조사가 있다면 그 결과가 혹시 억지로 쥐어짜 낸 게 아닌지 의심해봐야 합니다.
가짜 균형, 혹은 기계적 중립성(false equivalence)은 우리가 그동안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여전히 선거 자체를 망쳐버릴 수 있는, 그래서 더 위험한 함정입니다.
실제 정책 이슈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가 명확하게 나뉘는데 억지로 균형추를 맞추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예를 들어 트럼프와 클린턴 사이의 세제 정책 문제를 보면, 트럼프 후보는 막대한 감세를 약속하면서 정부 지출을 어느 부문에서 줄일 건지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심지어 국가부채마저 줄이겠답니다. 반면 클린턴 후보는 특정 계층으로부터 세금을 더 걷고 그 돈을 어디에 더 쓸지를 밝혔습니다.
이건 이념이나 후보에 대한 호오를 떠나 아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한 후보가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공약을 제시하고 있지만 다른 후보는 터무니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고는 셈입니다. 이런 명확한 차이를 애써 지워버리는 언론의 기계적 중립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기계적 중립성은 최근 들어 나타난 문제가 아닙니다. 몇 년 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정부 예산안에 관해 명백한 거짓말을 일삼을 때 이를 문제 삼은 언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누군가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주장해도 그 주장이 틀렸다고 보도하지 않고 “지구 모양 둘러싼 공방 치열” 같은 식의 제목으로 기사를 뽑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균형, 중립의 가치가 명백하게 잘못 구현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특히 올해는 이처럼 언론이 기계적 중립성에 함몰될 때 나타날 피해가 훨씬 크다는 데 있습니다.
뻔히 숫자로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경우는 더 복잡합니다. 이미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 가운데는 경쟁이 과열되면서 “두 후보 모두 비열한 수법을 들고 나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도가 분명 다른데도 둘을 한데 묶어 처리하는 게 중립이라고 믿고 있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상대방 후보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조롱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계집아이 같다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말투였습니다) 상대방에게 거짓말쟁이 딱지를 붙이는 데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고 테드 크루즈의 아버지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사실인 양 떠들었습니다. 클린턴은 샌더스 후보가 정책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똑같이 비열한 말싸움으로 포장될 만한 일인가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중앙 정치 아젠다 밀어 넣기(centrification)”라 부르는 작업입니다. 이건 반드시 일어난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트럼프에 열광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백인 우월주의 혹은 인종차별주의입니다. 이민자와 유색 인종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트럼프를 솔직한 후보, 자신들이 겪게 된 어려움을 해결해줄 후보라고 여기는 거죠. 그런데 이 점을 애써 외면하려는 언론이 꽤 많을 겁니다. 어떤 의도에서든 대신 언론은 트럼프 열풍에 여러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일 겁니다. 여기에 중앙 정치에서 주로 논의하는 의제가 등장합니다.
티파티가 등장해 빠르게 성장한 뒤로 이 문제는 미국 언론의 고질병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티파티가 등장한 원인을 놓고 월스트리트 구제금융에 대한 불만이니 정부 적자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의 재정정책 탓이니 언론은 실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위와 같은 분석이 티파티의 등장을 조금이라도 설명하는지 근거가 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티파티 운동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티파티의 기저에 깔린 동기는 분명합니다. 자신이 낸 세금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데 대한 백인 유권자들의 저항, 반감입니다. 그것이 주택담보 대출 상환을 늦춰주는 지원이든, 저소득층 건강보험에 쓰이는 돈이든, 왜 미국인도 아닌데 (혹은 백인도 아닌데) 저놈들이 나처럼 혜택을 받으려 하느냐는 겁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염증이 트럼프 지지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봤습니다. 틀렸습니다. 경제적인 우려 때문인 것도 아닌데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라뇨. 그렇지 않습니다.
경선 과정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아주 선명하고 노골적인 인종적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더 이상 미국 사회를 주름잡지 못하게 된 백인 남성들의 위기감, 분노, 절박함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걸 인종차별주의, 백인 우월주의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는 거라면 트럼프와 트럼프 지지자들은 뭐든지 받아들일 겁니다. 그런 잘못된 포장지를 언론이 열심히 만들어주고 있는 거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측을 덧붙이겠습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해도 대선 결과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는 분명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즉, 미국은 갈수록 인종 구성이 다양해지고 사회적으로도 다름을 받아들이는 다원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공화당의 지지기반은 점점 사회의 인적 구성과 괴리되고 있습니다. 트럼프 유세 현장에 백인만 있는 건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대중은 제대로 된 언론이 제대로 쓴 기사와 정보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기계적 중립성을 탈피하고 억지로 의제를 끼워 맞춰 현상을 해석하는 엉터리 기사 대신, 정말로 유권자들 사이에서, 미국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짚어내는 언론이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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