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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국 남부 공화당 텃밭에서 민주당원으로 살아가기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는 아내와 함께 한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공화당 지지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 가운데 하나인 남부 앨라배마주에 사는 민주당원이지만, 그날만은 정치를 잊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지역 미식축구팀을 응원했죠. 하지만 새해가 밝고 샴페인 숙취가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의 엄혹한 현실이 닥쳐왔습니다. 지난 대선 때 우리 카운티 유권자의 77%는 롬니에게 표를 줬습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는 요즘, 우리는 이웃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요?

2008년 당시에는 누군가 우리 마당에 세워둔 오바마/바이든 지지 팻말을 뽑아 시궁창에 처박은 일이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마주친 지인이 오바마가 무슬림이 아니냐며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온 적도 있죠. 모두의 동의를 전제로 힐러리 클린턴의 험담을 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작년 하반기, 도널드 트럼프와 테드 크루즈가 이 지역에서 선거 유세를 열어 수많은 지지자를 불러모았죠. 요즘 이 동네에서 민주당원이란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 정도가 아니라, 외계인 취급을 받는 존재입니다.

나는 20년을 뉴욕에서 살다가 1996년 남부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적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이 동네는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지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민권운동 시기를 거치며 점점 보수화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레이건이, 1990년대에는 보수 기독교가, 2000년대 들어서는 티파티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양당 간 다리 역할을 하던 보수파 민주당원과 온건 공화당원은 멸종 위기종이 되었습니다. 테드 크루즈나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된다면 차라리 힐러리 캠프로 가겠다고 내게만 몰래 털어놓은 오랜 공화당 지지자가 있을 정도입니다. 견해 차이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서 열린 크루즈 의원의 유세에서는 크루즈가 대통령이 된다면 첫날 무엇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한 지지자가 “힐러리를 감옥에 가두라”고 소리를 질렀다죠.

남부에도 특유의 고고한 진보주의적 전통이 있습니다. 모진 고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부심 넘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워낙 험한 일이 많다 보니, 대부분은 조용히 투표 날 투표용지에만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게 전부입니다. 사실 이곳에도 함께 개표 방송을 볼 수 있는 소수의 민주당 지지자 친구들이 있고, 정치색과 관계없이 예술가와 작가들을 반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마음 맞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지내다가, 스포츠 경기처럼 함께 열광할 수 있는 이벤트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면 되긴 하죠. 하지만 정치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지역 사회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식축구 경기가 없는 날이라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미국 정치판에서 교양있고 점잖은 대화는 위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닥에서부터 대화와 토론의 전통을 재건해야 합니다. 환경이 적대적이라도 소수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아내와 이 지역의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지역 신문에 글을 싣기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는, 지금은 의원이 된 공화당원과도 만나서 식사를 함께합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를 찾기 어렵지만, 이런 식의 우정을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민주당이 앨라배마를 가져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듣고 누군가가 의견을 바꾸는 일도 기대하기 어렵겠죠. 하지만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라도 누군가가 생각을 다시 해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요. 얼마 전에는 동네 카페에서 한 공화당원 부부를 만나 합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번도 민주당원과 대화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원들은 모두 이상하고 불친절한 사람들일 줄로만 알았다더군요.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끝에 우리는 서로가 외계인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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