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독일인들의 국가관이 전후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응답자의 75%가 독일은 히틀러 때문에 아직 “정상 국가”가 될 수 없고 국제사회에서도 “특별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독일인의 내면에는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이 뒤섞여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독일 문화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감정의 충돌을 해소하려는 시도 과정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독일의 정치 담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프랑스인, 영국인, 미국인들과 달리 독일인들은 자국 정부나 외국 정부에 의한 감시 가능성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정부에 의한 감시가 히틀러의 게슈타포를 연상케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인들은 또한 이스라엘에 대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며, 모든 주류 정당은 평화주의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독일인들은 권력, 심지어는 자국의 힘에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규칙에 집착하며, 동맹국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패권 국가”처럼 행동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역사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히틀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임기 초기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독일인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오바마 같이 연설에 능하고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정치인은 독일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독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지루하고 조심스러운 화법을 구사하는 것은 독일인들이 여전히 히틀러를 연상케하는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생활 역시 히틀러가 남긴 유산의 영향을 받습니다. 전후에 만들어진 독일 헌법 제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독일의 경찰은 미국인들의 눈에 만만한 존재로 보일 정도입니다. 독일의 감옥은 저렴한 모텔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난민들을 폭넓게 수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히틀러 때문에, 독일인들은 거대한 비전을 수립하는 것을 꺼립니다. 모든 일에 공개적으로는 쿨하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죠. 재생 에너지 혁명에서도 드러나듯 독일인들도 때로 대대적인 개혁을 지지하지만, 도덕적인 명분이 뚜렷한 경우에 한정됩니다.
히틀러 때문에 오늘날의 독일이 지루한 나라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독일은 여전히 세계가 독일의 미덕이라고 여기는 장점들, 즉 반드시 시간을 엄수한다거나 신뢰를 잘 지키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패” 뒤의 독일인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이들은 실제로 취미 에서부터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특이하고 개성있는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중년과 노년의 독일인들에게 히틀러가 남긴 상처는 사실 더욱 내밀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심리치료사 헬무트 라데볼트는 1928년에서 1947년 사이에 태어난, 이른바 “전쟁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세대와 1955년부터 1970년 사이에 태어난 “전쟁의 손자들” 세대가 모두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으며 비슷한 심리적 질병을 앓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전쟁의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야 했고,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이 풍요 속에서도 비상식량을 싸모으고, 불꽃놀이나 사이렌 소리를 무서워하는 것은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이죠. “전쟁의 손자들”의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얼어붙은 부모 아래서 자랐습니다. 전쟁을 겪은 부모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마비 상태로 평생을 보냈고, 자녀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심리 상태를 부모의 트라우마를 물려받은 동시에, 나의 사소한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불만을 갖게 되었죠. 실제로 “물려받은”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은 해당 세대의 40%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흔히 떠올리는 독일인의 질서와 안정에 대한 집착은 이런 세대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해석입니다.
<나의 투쟁> 저작권 소멸이 다가온 현재, 독일 사회가 처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합니다. 전체 국민의 5분의 1이 이민자 출신이기 때문에 히틀러 시대를 직접 경험한 가족이 없습니다. 젊은 세대는 과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히틀러를 낯설고 흥미로운 존재로 느낍니다. 기득권을 무너뜨린 히틀러의 저력에만 초점을 맞춰 네오나치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속죄의 의미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전히 자신자신과 동족을 두려운 존재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편집증까지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극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하일 히틀러”를 의미하는 숫자 88을 자동차 번호판에 쓰지 못하도록 하는 주도 있고, 201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1%밖에 득표하지 못한 네오나치 정당을 금지하기 위한 입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투쟁>이 다시 시중에 풀리는 일도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찬반 입장이 이미 엇갈리고 있죠. 바바리아 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책을 퇴출시키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는 일에서는 손을 뗐지만, 16주의 법무부 장관들은 이 책을 홍보하는 활동을 “선동”으로 규정해 기소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특정 국가가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거라면, 오늘날의 독일은 분명 “선한” 국가일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인들은 외부인들이 독일을 비난할 때 히틀러 그림을 들고 나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상 국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국익 수호마저 독일에게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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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편의 짧은 글을 통해서 한 나라를 이토록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표면적으로는 그간 제가 생각해오던 독일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내적으로 훨씬 많은 갈등들이 자리하고 있었네요.
네 저도 재밌는 글이라고 생각해서 옮겨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쟁에 대한 후유증 그리고 다른관점에서 독일을 볼수있는 시야...
독일 국민들이 느끼는 양가감정... 여실히 느낄수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