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가운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과 프린스턴 대학교의 관계만큼 한 사람이 학교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를 찾기는 아마 힘들 것입니다. 20세기 초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교를 명문 종합대학으로 한 단계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교육수준을 향상했고, 새로운 전공과목을 도입했으며, 여전히 프린스턴 대학교의 훌륭한 교육법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소규모 학습 모임 프리셉트(precepts)를 만든 것도 우드로 윌슨이었습니다.
위대한 총장을 기리는 의미에서 프린스턴 대학교는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대학원(Woodrow Wilson School of Public and International Affairs)를 설립했습니다. 일류 대학 안에서도 일류 대학원을 만든 셈이죠. 또한, 기숙사 가운데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 윌슨 칼리지(Wilson College)로 명명했습니다. 학생 식당의 스크린에는 우드로 윌슨이 남긴 명언이 늘 게시돼 있습니다.
윌슨의 영향력은 프린스턴 어디에서나 실감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턴 신입생을 위해 공연한 단막극에서는 이를 풍자할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 학교는 28대 대통령의 성지와 같은 곳으로 윌슨교 신자들이 가득한 곳이랍니다!”
하지만 윌슨의 공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과실에 관한 논의가 지난 9월 학생들이 붙인 여러 장의 격문들과 함께 갑자기 점화됐습니다. 바로 윌슨이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도 인종차별 성향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으며 흑인을 대놓고 차별하는 정책을 앞장서 실행에 옮겼다는 점입니다.
프린스턴 대학교 교정 곳곳에 포스터를 붙인 단체는 이제 생겨난 지 1년 된 흑인정의연맹(Black Justice League)이라는 단체입니다. 포스터에는 우드로 윌슨의 인종차별 사고가 그대로 묻어나는 인용구가 함께 실렸는데, 윌슨은 흑인 단체 지도자에게 “인종에 따른 분리(segregation, 인종차별의 의미)는 누군가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당신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 오히려 당신들이 먼저 지키고 따라야 할 것”이라고 한 말도 포함됐습니다.
지난주 학생 2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한 데 이어 흑인정의연맹에서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뒤, 학생 15명이 18일 밤 총장실을 점거했습니다. 이튿날인 19일, 아이스그루버(Christopher L. Eisgruber) 총장은 요구사항에 관한 학내 여론을 수렴하고 이 문제를 이사회에서도 논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흑인정의연맹이 내건 요구사항 가운데 첫 번째는 “우드로 윌슨의 유산 가운데 인종차별과 관련된 부분을 대학 측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공공정책대학원과 윌슨 칼리지의 이름을 새로 지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문제는 아이스그루버 총장이 포함된 이사회 소관이라 총장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스그루버 총장은 기숙사 식당에 걸린 커다란 윌슨의 벽화를 총장 재량으로 철거하고, 이사회가 앞장서 이 문제에 관한 학내 여론을 수렴하고, 나아가 이사회 내에서 이에 관한 투표를 진행하도록 촉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밖에도 요구사항에는 “소외계층, 차별받은 이들의 역사”를 다루는 과목을 신설할 것, 교직원과 교수들이 문화적 다양성을 숙지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교육과정(cultural competency training)을 거칠 것, 흑인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생활할 수 있는 장소와 기숙사를 마련할 것 등이 포함됐습니다.
미주리주 퍼거슨,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등에서 인종 문제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 미국 전역에 걸쳐 곪을 대로 곪은 대학교 내의 인종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을 때부터 프린스턴 대학에 관한 논쟁은 우드로 윌슨이란 인물에 대한 재평가에서 시작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미국 정치, 문화에서 어떠한 상징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상징적인 인물이라도 우리가 지금껏 잘 알지 못했던 부분에 관해서 학계에서 검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토론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나아가 상징 너머의 가치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스그루버 총장은 말했습니다.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을 바라보는 동료 학생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흑인정의연맹의 문제 제기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학교의 간판과도 같은 윌슨의 이름 자체를 지워버리는 건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웹사이트 Change.org에서는 학생들의 주장에 대한 반대 청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흑인정의연맹의 요구가 과거의 인물을 현재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해 재단하는 위험한 선례를 남길지 모른다고 지적하며 윌슨의 유산 가운데 유익한 것들마저 지워질지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흑인정의연맹 소속 2학년 학생이자 카메룬에서 태어나 워싱턴 근처에서 자란 윌글로리 탄종(Wilglory Tanjong)은 이런 우려에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우리는 우드로 윌슨의 모든 유산을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캠퍼스와 학교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이란 인물을 지금처럼 우상화하고 거의 신격화하는 건 우리 학교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배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드로 윌슨은 세계 1차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창설을 주도했던 인물로 잘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윌슨 전 대통령은 남북전쟁 이후 재건 시대(Reconstruction)를 지나며 흑인들이 점진적으로 쟁취해냈던 권리를 다시 빼앗고, 연방 정부의 고위 공무원들 가운데 흑인들을 잇달아 해고했으며,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흑백 분리가 철저히 이뤄지고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감시하는 등 인종차별 성향을 전혀 숨기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남부 출신으로 인종차별적 사고를 굳건히 유지했던 윌슨은 “위대한 쿠 클룩스 클랜(a great Ku Klux Klan)”이란 글에서는 “무식한 검둥이들(ignorant Negroes)의 표 덕분에 계속해서 미국 정부가 짊어져야 할 견딜 수 없는 짐”으로부터의 해방에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가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윌슨이 총장으로 있는 동안 프린스턴은 단 한 명의 흑인 학생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버드와 예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흑인 학생의 입학을 허가했지만, 윌슨은 당시 이렇게 썼습니다. “학교의 성향과 전통 덕분에 아직 흑인은 아무도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194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흑인 학생의 입학을 허락합니다.
오늘날 프린스턴에서도 흑인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과 소외를 느낀다고 토로합니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 실력은 부족한데) 피부색 덕분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을 종종 느낀다는 겁니다. 교수진 가운데 흑인은 2%에 불과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학생들 가운데 흑인 비율은 8%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자란 정치학과 4학년 학생 오지오마 오비오누오하(Ozioma Obi-Onuoha)는 윌슨의 이름과 사진을 볼 때마다 자신이 이곳에서 절대로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도저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계속 저를 따라다니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주로 익명으로 흑인정의연맹의 주장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의견도 눈에 띕니다. 교지 <Daily Princeton>의 기사에 달린 댓글 가운데는 “그래서 흑인 학생들만의 공간을 만들면 거기에는 정수기도 따로 설치하고 그러겠다는 거냐”는 글도 있습니다.
지난 20일, 기숙사 윌슨 칼리지의 학내 식당에서는 윌슨 대통령이 야구장에서 시구하는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대형 벽화 앞에 학생들이 모여 훨씬 더 진지한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철학과 4학년 학생 타킴 윌리엄스(Takim Williams)는 말했습니다.
“사실 저도 갈피를 못 잡겠어요. (저는 흑인이지만) 제 피부색 때문에 드러나는 차별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사실 (윌슨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아주 격렬한 반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그는 학교와 기숙사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극단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옆에 앉아있던 아시아계 미국인 2학년 학생 칼버트 찬(Calvert Chan)은 말했습니다.
“글쎄요, 건물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흠집도 없는 완벽함을 요구한다면, 그런 요건을 충족할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가까이 앉아있던 백인 학생 아미나 시몬(Amina Simon)은 조금 다른 의견을 폈습니다.
“한 기숙사에 산다는 건 그 기숙사의 이름을 딴 사람의 정신과 가치를 기리고 지지한다는 의미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윌슨은 기숙사 이름에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흑인 학생들에게 흑인을 그토록 심하게 차별했던 사람의 이름을 딴 기숙사에 살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대학원장인 시실리아 루즈(Cecilia Rouse)는 이 문제에 관해 어느 한쪽의 의견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미국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학교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어떤 파급력을 미칠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일단 우리 학교에서 수학한 동문의 자부심은 우드로 윌슨 스쿨이라는 학교 이름에서 오는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하지만 우리 학생들과 교수진, 교직원 모두가 인종 문제에 관한 대학교 전체의 태도, 유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을 이어가는 건 분명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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