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는 여러 가지 흠결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장점을 갖춘 후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기도 하지만 어쨌든 성공한 사업가이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입에 담아 구설수에 오르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가식이 없는, 솔직한 언변을 갖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 치고 전반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존경 받는 이가 드문 상황에서 트럼프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신선한 인물이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오롯이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기존 정치인과 다르다’는 이미지를 설파하는 것이죠.
트럼프의 장점들 가운데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아주 명료하고도 강력한 선거 구호 “Make America Great Again”입니다. “다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 혹은 “잘 나가던 미국으로 돌아가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를 요순시대처럼 그리워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모든 정치인들이 하는 시늉만 하고 결코 해내지 못했던 그 좋았던 시절을 되살려내는 일을 트럼프는 제대로 해낼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구호가 적힌 빨간색 캠페인 모자는 불티나듯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 특히 백인들은 미래를 비관하거나 절망적으로 바라봅니다. 백인들 가운데 30세 이하의 젊은이들과 은퇴를 앞둔 50대 이상 장년층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아메리칸 드림(옮긴이: 여기서는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 사회라는 의미에서 계층 이동이 활발히 일어나는지 여부 정도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은 끝났다고 답한 이들이 80%를 넘습니다. 트럼프는 이들에게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냥 미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다시 예전처럼”,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트럼프가 말하는, 또 공화당 지지자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그 요순시대는 도대체 언제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지름길일까요? 트럼프가 정확히 어느 시절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몇 가지 지표를 토대로 그 시절을 복구해봅시다.
2차대전 승전 후 참전 군인들이 돌아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가 아무래도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좋았던 시절이 언제 끝났냐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갈립니다.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을 통해 1980년이 호시절의 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때까지는 부자들과 중산층의 부가 동시에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는 중산층이 정체되거나 계속 약화됐다는 겁니다. 그보다 앞서 1971년 단기적인 경기 침체를 기점으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1950년대는 사회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좋았던 시절이었다고 결론 내려도 무리가 아닐 겁니다. 1950년 기준으로 미국은 1인당 GDP가 세계에서 가장 높았습니다. 1973년까지만 해도 2위를 유지했습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넘쳐났고, 실업률이 올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 이내 다시 떨어졌습니다. 집값, 기름값, 심지어 영화비도 쌌습니다. 경제적인 풍요와 거기서 비롯된 평화가 흘러넘치던 낙관의 시대였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 대부분이 사회적인 악습과 구태를 그리워하는 건 아닐 겁니다. 즉, 경제적인 풍요와 평화를 그리워하는 것이지 이들이 1950년대만 해도 버젓이 남아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마녀사냥, 여성은 신용카드를 신청도 할 수 없었던 제도를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그래서 실상을 알고 나면 뜨악해할지도 모를 사실이 있습니다. 1950년대는 전쟁을 치르며 다져진 사회적인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공고했던 시기로 무엇보다 정부가 앞장서서 시장과 사회 곳곳을 강력히 규제하던 시절이라는 점입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큰 정부, 노동조합, 높은 세율이 이 시기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전체 노동자의 1/3이 노조원이었으니 웬만한 가족에 한 명씩은 노조원이 있던 셈입니다. 당시 최고 과표구간의 한계 세율이 91%였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가장 많이 돈을 버는 이들에게 당시 미국 정부가 생각하던 적정 세율은 70% 정도였습니다. 10억 원을 벌면 7억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시절이 미국에도 있었던 겁니다. 최근 100년 사이에 가장 세율이 낮은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높은 세율입니다.
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면, 공화당 지지자들, 특히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트럼프의 구호를 지지하는 이들은 적잖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고 경제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 거기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부자 증세,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필연적인 노조의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는 트럼프가 아니라 스펙트럼의 정반대편에 있는 버니 샌더스이기 때문입니다. (Atl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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