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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던 팔레스타인 소년, 비올라를 들고 평화를 연주하다

이스라엘을 향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무장봉기를 일컫는 인티파다(Intifadas)가 처음 일어난 1987년, 엄숙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이스라엘군 탱크를 향해 자기 주먹보다도 더 큰 돌을 던지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87년,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8살 람지 아부레단

9년 뒤인 1996년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의 알 아마리(Al Amari) 난민캠프. 미국의 음악 합주단(chamber-music ensemble)이 방탄차량을 타고 상처받은 땅을 찾았습니다. 11킬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를 오는 데 통과해야 할 검문소가 하도 많아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들이 알 아마리를 찾은 목적은 평생 이스라엘군 탱크와 철조망에 둘러싸여 살아온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일일 음악교실을 열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는 1993년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타결된 오슬로 협정 덕분에 거의 반세기만에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던 시기였습니다. 몇 년 뒤 양측의 갈등이 다시 폭발해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남으로써, 이 시기는 결국 잠깐의 소강상태였던 것으로 정리됐습니다.

혹자는 미국 주 예루살렘 총영사가 생각해낸 일일 음악교실을 별 효과도 없는 외교적 제스처일 뿐이라고 혹평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날 합주에 인생의 진로가 바뀐 한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9년 전 돌멩이를 던지던 모습이 사진에 찍혔던, 당시 17살 청년이 된 람지 아부레단(Ramzi Aburedwan)입니다.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람지는 4남매 가운데 맏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주워와 손질해 간신히 굴러가게 된 고물 자전거를 타고 신문 배달을 하던 람지는 많은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영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일일 교실에서 난생 처음 보는 비올라를 들고 솔(G) 음을 정확하게 연주해 단원들을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합주단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 브람스의 G단조 피아노 4중주를 공연하고 돌아갔는데, 그 연주는 람지에게 난생 처음 겪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네 가지 다른 음을 한꺼번에 낸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말도 안 되는 마법처럼 보였습니다. 아랍 음악에서는 합주를 하더라도 모두가 같은 음을 내거든요. 다시 말해 제 사전에 ‘화음’이라는 단어는 없었던 셈이죠.”

20년이 지나 그때를 회상하는 람지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미세한 떨림이 느껴집니다. 람지에게,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음악이란 고물 라디오를 통해 듣던 아랍어 방송에서 나오던 노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지던 민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각기 다른 네 음이 동시에 내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엔 정말 귀를 막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이상한 소리가 나면 어떨지 걱정이 됐는데, 다른 음들이 공존하며 오히려 화음을 내는 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진짜 신기했죠.”

합주단은 돌아갔지만, 람지는 이후 계속 비올라를 탐구하고 이를 공부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듬해 미국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 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다녀온 그가 돌멩이 대신 비올라를 들고 있는 모습의 포스터가 요르단강 서안 곳곳에 붙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팔레스타인에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프랑스 앙주 음악원(Conservatoire d’Angers)에 입학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의 <왕벌의 비행>을 연습하고 연주했을 때 그는 누구보다 행복했으며,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곧 찾아올 것만 같았다고 말합니다.

“알 아마리의 난민 캠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죠. 더 이상 이스라엘 군인들을 안 봐도 되는구나 하는 희망도 있었고요.”

2000년 2차 무장봉기는 지난 번보다 훨씬 피해가 컸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탱크와 포격으로 사실상 초토화시켰으며, 아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프랑스에서 동료 연주자들을 섭외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거리 공연을 다녔을 때,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검문소, 바리케이드, 봉쇄벽은 총 757개나 됐습니다. 그들이 도착해 연주를 한 난민 캠프 어디에서나 어린 시절 람지 같은 해맑은 웃음을 짓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겹겹이 둘러싼 바리케이드와 탱크, 새로이 건설되기 시작한 약 7미터 높이의 분리장벽(West Bank barrier)까지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은 정상과 거리가 멀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람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음악 학교를 열어주자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고, 2005년 아랍어로 바이올리니스트를 뜻하는 알 카만자티(Al Kamandjâti)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1948년 전쟁에서 패한 뒤 70만 명이 난민이 된 나크바(Nakba)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잃은 건 나라와 집, 땅, 재산이 다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화도 점차 소실되어 왔고, 음악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난민 가운데 가수, 악기 연주자, 합주단원 등 음악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이내 나라를 찾고 살 수 있는 땅을 찾을 거라 믿은 탓에 그들의 음악을 정리하고 보존하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사랑과 인생과 믿음을 노래한 음악은 사라지고, 억압과 저항을 노래하는 음악만이 남았습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처럼 음악에서도 일상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상태가 자취를 감춘 겁니다.

람지는 인터뷰 내내 평범한 삶과 일상, 정상(normal)을 언급했습니다. 그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오후 워싱턴 DC 근교의 한 교회에서 창문 너머로 들리던 유치원에 다닐 법한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 웃음 소리가 바로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에서 본, 까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어디 갈 일이 있으면 언제든 거리로 나가 걸어가면 되는 일상이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차로 한 시간 거리에 각기 다른 바다가 네 곳이나 있는 데서 태어나 자랐는데도, 20살이 될 때까지 수영할 줄도 몰랐던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바다 가까이에 살아도 바다에 갈 수 없습니다.

36살이 된 람지는 아랍의 전통 악기로 다섯 줄 기타에 가까운 부주크(bouzouk) 연주자이자,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만 500여 명에 이르는 알 카만자티 학교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때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와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설립한 이스라엘, 아랍인들이 함께하는 합주단에 몸을 담았지만, 서안 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불법으로 확장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둘러싼 의견 차이로 탈퇴했습니다. 합주단은 현재 팔레스타인에서는 보이콧 대상으로 지목돼 있습니다.

람지는 알 카만자티가 음악 학교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정치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결코 비껴갈 수 없는 주제이긴 하지만, 많은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러 와서까지 정치적인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배우고 연주할 때 그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람지는 아랍어로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여덟살 때 돌을 집어들던 순간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 람지는 결코 그것이 폭력을 상징하는 행위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인티파다를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알리고 싶었던 건 “우리가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리는 결코 폭력을 원치 않았죠. 여덟살 아이가 그 절규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돌멩이를 집어든 겁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평화적인 방법이기도 했죠. 비올라도 마찬가집니다.”

비올라를 든 람지 아부레단. (사진: Eloise Bollack / Demotix)

람지는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음악 공연을 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난민캠프 대부분을 지나는 열차가 출발하는 바티르(Battir) 지역 언덕에서 2011년 여름에 했던 공연에는 이 음악을 실은 기차가 난민캠프 곳곳을 지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달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이때 연주했던 모차르트 6번 교향곡 F장조는 예루살렘 근처 콸란디아(Qalandia) 검문소 앞에서 펼친 게릴라 공연 때도 연주했습니다. 이 공연은 람지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 공연인데, 검문소를 지키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검문을 받기 위해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분리장벽 앞에 서 있지만, 음악을 듣는 순간 만큼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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