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높은 부정부패 지수, 억압적인 정부를 생각하면 크림 반도의 주민들이 러시아 국민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19세기에 어색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고,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경우도 많죠. 1848년 독일 혁명 당시에도 리버럴들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통일 국가를 꿈꾸었지만, 결국 독일 통일은 민주주의적 투표가 아닌 비스마르크의 권모술수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도 민족주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집권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시민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 의해 법이 만들어지고 통과된다고 느끼면 정부는 정통성을 획득하죠. 그러나 투표 만큼이나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민족’입니다. 나와 같은 민족인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이는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을 때 독일계 주민들은 이를 환영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2차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단일민족 국가에 가까운 모습으로 탄생했고, 우연인지 몰라도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아주 잘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 여러 민족들은 다시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민족의 용광로”에서도 민주주의가 잘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국이 건국 이후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분리, 차별의 역사를 이어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는 잘 굴러가는 편이지만, 1998년의 대통령 탄핵안 발의, 2000년 대선 재검표 논란, 그리고 오바마가 미국 태생이 아니어서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좀처럼 굽히지 않는 세력의 존재를 볼 때, 미국에서도 정부의 정통성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유럽에 있습니다. EU 자체가 민주적인 절차를 얕보는 경향이 있고, 유럽에는 엘리트들이 주도해 온 유럽을 EU 프로젝트로 몰아넣었다는 인식이 퍼져있죠. 높은 연봉을 따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엘리트들에게는 세계화가 긍정적인 개념일지 몰라도, 대다수의 평범한 유권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쉽게 벗어날 수도 없는데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경쟁해야 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 때문에 익숙한 내 삶의 터전이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권자들은 민주주의의 세부적인 요소(소수자 권리 등)에 더 이상 예전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애국법”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반테러 법안에도 이런 현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민주적인 권리를 “중산층의 것”, “엘리트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좋은 일자리와 임금을 누릴 권리에 대치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주장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죠.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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