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왼쪽 전두엽에는 아주 커다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날 아침, 그의 이웃은 현관에서 소변에 젖은채로 혼란스러워 하는 그를 발견했고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알 수 없는 뇌 사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한 레지던트는 이것이 뇌졸중에 의한 세포의 괴사일리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얼룩은 하나의 혈관이 만든 손상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다른 레지던트는 이것이 다른 뇌의 부분들을 찌그러뜨리지 않은걸로 볼 때 암일 가능성도 낮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다른 부분의 형태가 비정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그가 자신의 뇌에 왜 커다란 하얀 얼룩이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그 역시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물었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어디에 있나요?” ‘그리고 당신의 머리속에 있는 건 무언가요?’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있지요.”
그가 “음성모방(echolalia)”에 걸려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전두엽이 손상되었고 공허한 단어와 문장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병원에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MRI 사진은 마치 누군가가 커피를 쏟은 것 같답니다.’
“알겠습니다.”
“당신은 왜 당신이 병원에 있는 지 알고 있나요?”
“나는 왜 그런지 몰라요.”
“당신은 당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걱정되나요?” ‘나는 그래요’
“나는 걱정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가 암인지를 알기 위해 척수검사을 했습니다. 그 결과를 아는 데에는 일주일이 걸립니다. 그리고 척수액에 암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뇌에 있는 것이 암이 아니라는 보장은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결과는 뇌의 조직검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뇌를 열어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척수액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정신상태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뇌졸중이었다면 그는 나아질겁니다. 암이었다면 나빠질겁니다. 며칠동안 우리는 그에게 여러 질문을 던질 것이고 작은 변화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치료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며칠동안 나의 질문을 듣던 그는 조금씩 다른 대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때로 그는 “큰 연구소”라든지, 다른 이름의 “병원”, 또는 “사무실 같은 곳”이라고 답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대답을 했고, 가끔씩 그것은 비교적 정확했습니다.
나는 그의 반응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 말을 기억하고 전날의 말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걱정하나요?”
“나는 걱정합니다.” 이건 음성모방일까요? 아니면 감정의 표현일까요? 매일 나는 그가 걱정하기를 바랬습니다. 걱정이란 감정을 의미하며 이는 그의 전두엽이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왜 당신은 걱정하나요?”
“나는 모르겠군요.”
매일 매일 우리는 또다른 기초를 쌓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매일 매일 나는 그가 걱정하기를, 그리고 이유가 있기를 바랬습니다.
“왜 당신은 걱정하나요?” ‘당신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나는 내가 아프기 때문에 걱정합니다.”
“당신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모르겠군요.”
그는 여전히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지상실증(Abulia)”은 전두엽의 손상에 의한 것입니다.
하루는 그가 갑자기 내게 말했습니다.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어요.”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뭐가 문제인가요?”
“나는 모르겠군요.”
“그럼 뭔가가 문제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왜냐하면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병자이고,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걸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식에 있어 이런 극히 작은 진전은 그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의사들은 희망적이 되었습니다. 간호사들은 그렇게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침대를 적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보다 덜 침대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자신이 누워있는 병원의 이름을 말하는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도착한 그의 척수검사 결과는 그것이 악성종양임을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의 방으로 돌아 갔습니다. 나는 나의 의사로서의 훈련에 내가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잔인함입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그의 머리속에 집어넣었고, 그 단어들이 그의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기분이 어떤가요?”
“나는 괜찮아요.”
“뭔가 당신에게 필요한게 있나요?”
“나는 없어요.”
“있으면 내게 말해주세요.” 나는 그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뒤로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며칠 동안 그의 답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나는 질문들을 바꾸었고 그가 답해야 할 내용들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그의 답에서 의미를 찾기를 바랬던 나머지 그의 인식에 나타난 작은 물결을 큰 파도로 생각했습니다.
나의 한 친구는 철학적인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은 바다와 같지.” 우리가 그 표면을 따라 항해할 때, 우리는 바다의 깊이를 종종 무시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표면의 물결에만 주목합니다. 우리는 종종 표면의 작은 변화만을 모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환자의 회복의 물결은 그의 손상의 깊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물결에 집착하고 있었고, 이는 그것이 나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따라가다가 나는 그 질병이 몇 킬로미터의 깊이를 가졌다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지금 어디있는지를 아는지 묻는 것을 멈췄습니다. 이제는 내가 알고자 했던 그 답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그가 걱정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Scientific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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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원제 Surfacing을 ''나는 그가 걱정하기를 바랬습니다'로 뽑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 'I hoped he wasn’t worried.'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나봅니다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감성적인 어필이기는 하지만 필자가 전하고자 한 중심어는 아니지요. 오히려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이 Surfacing의 의역으로는 적당할 것 같군요. 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 어쩔 수 없이 제목을 의역해야 할 -- 경우, 특히 오늘 글과 같이 과학적인 사실전달이 아닌 -- 물론 뇌 손상이 끼치는 영향이나 의학도의 고민이 잘 드러나 있긴 하지만 -- , 보다 감성적인 글에서 제목을 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가능하면, 훌륭한 독자분의 의견을 받고, 토론과 투표를 통해 제목을 정하고 싶다는 -- 물론 현실적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 생각도 몇 시간 전에 들었었구요.
일단,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 이 원제 Surfacing 과 훨씬 잘 맞는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아주 좋군요!) 저도 정확히 그 문장은 아니었습니다만, Surfacing 과 관련된 제목은 여럿 생각했었습니다. 이 Surfacing 이 나오게 된 중간의 인생 - 바다 비유와 관련하여 몇 가지 제목들을 생각했었구요.
한편으로, 제가 저희가 옮기는 글의 제목에 있어, 저희 사이트의 원칙 측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곧, 독자들이 글을 읽지 않고도 이 글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제목을 가능하면 쓰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독자들의 시간을 절약해주기 위함이고, 동시에 흔히 말하는 낚시 -- 의도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 의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처음 몇 시간 동안 써 놓았던 제목은 "뇌손상을 입은 환자에 대한 기억" 이었습니다. (꽤 dry 하고 straight 하지 않나요?) 하지만, 그 뒤로 몇 번 글을 다시 읽으면서, 늘 겪게 되는 일입니다만, 감정의 과잉과 함께, 새로운 제목들을 써보게 되었고, 그러다가 바로 지적하신 것처럼,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반전이 저자의 마음이 바뀐 것이며, 곧 한 때 그가 스스로 걱정하기를 원했지만(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난 이상, 그가 걱정을 하는 것이 곧 그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마지막에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고 제목을 그렇게 지었구요. 물론 이 시점에서, 이 제목이 글의 내용 -- 의학, 뇌손상 -- 과는 거리가 다소 멀어졌다는 점 또한 인정합니다.
사실 이런 면에서는, 위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제목을 오히려 그대로 옮기기 보다 의역을 강조하는 편이라고 말씀드려야 하겠네요.
그 외에, 이미 아시겠습니다만, 이 글은 전문번역을 하였으나, 한 군데, '잔인함' 이 들어있는 문장의 'Without diagnosis as an excuse,' 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원문의 끝에서 두 번째 문장인 "look down"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전문번역가가 아니다 보니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어쨌든,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에 대한 저의 의견은, 제목으로도 괜찮고, 원제(저자가 표현하려 했던 것)도 잘 포함하고 있지만, 다소 광범위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반면 제가 정했던 제목의 장점은 위에서 설명을 드렸구요. (사실 제가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미리 생각할 수 있었다면, 둘 중 어느 것을 제목으로 택했을 지 쉽게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군요.)
혹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가 윗 부분에 언급했습니다만, 아래에 다른 독자들의 의견(다른 제목도 가능하겠구요)이나 간단한 투표를 받아보고, 충분히 한 쪽으로 몰리는 경우 글의 제목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댓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점이 다소 아쉬운 현실이긴 합니다...
어이쿠. 이렇게나 긴 의견을 주시다니요. ‘나는 그가 걱정하기를 바랬습니다’도 충분히 좋습니다. 특히나 긴 문장에서도 운율을 즐길 수 있다는 제 신념에서 볼 때 더욱 그렇구요. 이런 시도들은 시작과 끝이 맞물려 영화 ‘The Sixth Sense’처럼 묘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댓글을 달아 다른 의견도 전해드린 것은 아마도 ‘나는 당신(veritaholic님)이 사람들의 다른 시각에 대해서도 걱정하기를 바랬습니다’때문이 아닐까요.^^
ㅎㅎ 좋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묘한 파문에 저도 동의하구요. 좀 더 확장 해보면, 어떤 구조들이 사람들을 자극하는지, 그리고 왜 자극하는지, 또 모든이들에게 동일한지 아니면 사람마다 다른지, 또 글(스토리)에서만이 아니라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에서도 같은 자극이 일어나는지 등의 많은 의문점들이 떠오르네요. (아마 역시 누군가가 많이 연구해놓았을 듯 합니다...)
사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가 이와 비슷한 recursion 을 수학, 미술, 음악에서 찾았던 것 같구요.
네. "다른 시각"에 대해 늘 걱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글을 읽고 제목을 다시 보니 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제목을 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낚시성제목을 달지 않는 뉴스페퍼민터의 원칙에 대해 십분 공감합니다. 수고 많으세요.
감사합니다.
박스지나 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뉴스페퍼민트 글 읽고 눈물 그렁거리긴 처음입니다. 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kong 님, 감사합니다. ^^
위에 제목 관련된 코멘트가 달린 게 보여서 남깁니다. 바랬습니다가 아니라 바랐습니다가 맞는 표기로 알고 있어요!
네, 맞습니다. 하련님, 감사합니다.
저도 글을 쓴 직후에 발견했습니다만, 다른 논의들이 있어 아직 수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부분의 맞춤법에 대해 어떤 분은 '바라' 와 '바래' 가 그만큼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는 걸로 볼 때, 언어가 변화하는 중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기도 하셨더군요. 일단 (성공을)바라다와 (색이)바래다는 다른 뜻의 동사이므로 구분하는 것이 옳다고(효율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바람(wish)'과 '바램(decoloration)'으로 오게 되면 '바람(wish)'은 또다른 '바람(wind)'과 혼동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 '효율성'근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는 맞춤법이 권하는 대로 쓰는 것이 옳겠지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