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학, 사회학, 건축 등의 분야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고방식입니다.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절대적 진실과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특히 언어의 측면에서 강조합니다. 몇몇 인문학 분야에서 보여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한 특징은 그들의 문장이 매우 난해하다는 점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에 대하여”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외부 또는 내부에서 퍼져 나오며 가능한 것, 참을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넘어 분출되는듯한 위협에 대항하는, 존재의 난폭하고 어두운 혐오감들 중 하나가 아브젝시옹 안에는 나타난다. 이것은 그곳에 매우 가까이 있으나, 완전히 같아질수는 없다. 이것은 간청하며, 걱정하며, 욕망을 매혹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유혹되지 않는다.
철학자 존 설은 미쉘 푸코에게 왜 그의 말은 쉽게 이해되는데 반해 그의 글은 그렇게 답답한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푸코는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진지한 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글의 25%는 이해할 수 없는 허튼 소리일 필요가 있다고 답했습니다.물론 푸코는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 학파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했지만, 그 역시 지식은 권력의 작동을 통해 생산된다고 믿었으며 그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고의적인 모호함을 의도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1996년 뉴욕대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해체주의와 과학용어를 뒤섞어 포스트모더니즘 분야에서 손꼽히는 저널인 “소셜 텍스트”에 투고한 바 있습니다. 아래는 그의 논문의 일부입니다.
물리적 “현실”이 사회적 “현실”보다 결코 그 바닥에 사회적 언어학적 구조를 덜 깔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적 “지식”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이 지식을 만들어낸 문화 속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부호화한다는 것, 그리고 과학에서의 진실이라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이론-의존적이며 자기-참조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 과학공동체의 담론은 그들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혹은 비주류 사회에서부터 나오는 반-헤게모니적 주장에 대해 자신들이 특권적 인식론적 상태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따라서 점점 더 명백해졌다.
이 논문은 심사를 통과하고 출판되었습니다. 곧 소칼은 자신의 이 논문이 엉터리였고 명백한 패러디였으며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이런 특징들을 비웃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거의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글을 쓰고 싶어 할까요? 왜 어떤 분야의 모든 학자들은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선호할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들의 글을 좋아할까요?
물론 여기에 간단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가지 가능한 답은, 이들이 실제로 어떤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객관적인 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실제 같은 형식의 종교행사에서 기독교는 모자를 벗게 하며 유대교는 모자를 쓰게 하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줍니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것이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내용이 모호하다고 해서 반드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왜 사람들이 그 모호한 내용을 좋아하는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를 유혹하는 이유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해석행위가 곧 우리에게 심오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은 그들의 글에서 심한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과학논문 역시 포스트모더니즘만큼 이해하기 어렵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과학논문은 어려운 전문용어때문에 어려워진 것일 뿐, 이들 전문용어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우리는 결국 이들이 쉬운 용어들을 이용해 잘 정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학논문은 하나의 해석을 목표로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해석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테바의 글에는 전문용어가 존재하지 않고, 나는 그 글에 쓰인 단어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대학의 교수로서 나는 그런 글을 볼때마다 그 글을 일일이 수정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학생들의 글을 고쳐야 하고, 그들은 아직 그런 습관에 물들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Skep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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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bunch of snobs..
“노력에 대한 정당화”라는 이 현상은 인지부조화를 막기 위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 문장이 이상한 거 같은데 누가 확인 좀 해주세요. 인지부조화를 막기 위한 현상이 아니라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현상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Just as people sometimes value things when they pay more for them, they take the expense of something to be an indicator of its value. It is a way of reducing cognitive dissonance: if you’ve worked hard for something, you will feel like an idiot if you believe that it’s not valuable. "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인지부조화 현상"의 정의 자체가 "인지의 부조화(=모순)"를 감소시키기위해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같은 두가지 반대되는 표현이 모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분야에 저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표현의 근거가 되는 문헌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알려주시면 적절하게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인지 부조화가 일어나는'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되어 본문을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
군대에서 개고생 -> 끝났는데 아무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면 억울 -> 내가 인생에서 2년을 정말 허비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으므로 전우애라든가 뭐라도 건졌다고 생각..
대충 이런 흐름이니까 문맥상 '노력에 대한 정당화'가 인지 부조화를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고 읽는 게 맞지 않나 하네요.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노력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고, 노력에 대비하여 소득을 정당화하는 것이 실패할 때이므로 인지부조화>는 오독이 아닌가 합니다.
설사 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실제로는 가치가 없는 일을 가치있다고 격상하는 것 자체가 사실에 대한 인지가 왜곡되어 부조화가 발생한다고 읽을 가능성은 있겠으나, 본문에서 말하는 부조화란 인지하지 못함이 아니라, 노력에 상당하는 의미질량이 부족하게 되는 '불균형'을 지칭하는 것이니까요.
프로이트로 바꿔서 '합리화rationalization'로 생각해보면 더 쉽지 않을까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무의식에서 자기를 숨기기 위해 건네는 거짓말들은 일종의 정당화이고.. 그러한 거짓말들은 무의식이 폭로되어 생기는 인지부조화(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를 막기 위한 현상이 되겠지요. 이 경우 무의식을 대면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dissonance라고 칭할 여지도 있겠으나, 그런 관점은 포스트모너니스트들의 관점이 되겠고 .. 포스트모너니스트들이 설명하는 근대인의 일반적인 특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밤에 제가 인지부조화 일어날 판이군요.. 이럴수가..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가 페미니즘과 환경주의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킨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안타깝습니다. 많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결국 모더니스트로 회귀하는 것은 그런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찌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거쳐야 할 진보의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가...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 했다고 얘기하는것은 조금 본말의 전도가 아닐까요?
즉,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인해서 이성에 대한 불신이 발생했다기 보다는
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대두된 것이라는게 현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 아닐까 싶어서 언급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