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ge.org 재단의 질문인 ‘어떤 과학적 아이디어를 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리처드 도킨스는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버려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아래는 리처드 도킨스의 글입니다.
본질주의는 그리스의 기하학자 플라톤의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그에게 원이나 직각삼각형은 수학적으로는 존재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형태였습니다. 그에게 모래위에 그려진 원은 이상적인 원의 근사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기하학에서는 잘 작동했지만 이것이 다른 분야에 적용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언스트 메이어는 인간이 진화론을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 본질주의에서 찾았습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피와 살을 가진 토끼를 이상적인 토끼의 불완전한 형태라고 간주하는 한 이 토끼가 토끼가 아닌 다른 동물을 조상으로 가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본질주의는 ‘토끼스러움’의 본질이 토끼의 존재를 ‘선행(prior to)’한다고 말하며 이는 누군가 토끼가 진화한다는 생각을 내놓았을 때 이를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은 종종 특정한 화석이 인간인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인지를 따집니다. 그나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사이에 수많은 존재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발견된 화석을 특정 종으로 억지로 분류하려는 시도는 본질주의자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입니다. 인류의 역사중에 처음으로 인간을 낳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아기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동물들을 분류하는 모든 기준은 지구의 역사에서 극히 짧은 시간대, 곧 이들의 공통조상이 모두 사라진 ‘현재’에만 유효한 기준일 뿐입니다. 만약 어떤 기적이 일어나 모든 중간화석들이 발견된다면 이들을 정확히 다른 종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창조론자들은 이 종간의 차이를 진화론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사실 이 차이는 분류학자들이 우연히 만난 행운과 같습니다. 한 화석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인지 인간인지를 따지는 것은 키가 175cm 인 누군가가 키가 큰지 작은지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본질주의는 인종차별적 용어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다수는 사실 여러 인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본질주의는 대부분의 공식 서류에 자신의 인종을 하나로 표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증조부모 여덟명 중 한 명이 아프리카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인간은 연속된 대상을 다루는 데 있어 지적으로 능숙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의 본질주의가 가진 부정적인 영향권에 속해 있습니다.
낙태와 안락사같은, 도덕적 논란이 되는 문제에도 본질주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뇌사자는 어떤 시점에서 ‘사망’으로 정의되어야 될까요? 태아는 어떤 발달단계부터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본질주의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태아는 하나의 세포에서 갓난아기가 될때까지 서서히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다움’이 등장하는 특별한 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 진실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그래도 어떤 한 순간에 비로소 태아는 인간이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중년의 한 인간이 노인으로 바뀌는 특별한 하루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태아가 인간이 되는 데 있어 1/4의 인간, 절반의 인간, 3/4의 인간이라는 단계를 거친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겁니다. 그러나 본질주의자들은 나의 이런 표현을 인간성의 본질을 부정하는 끔찍한 표현이라며 나를 비난할 것입니다.
진화역시 태아의 발달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조상들은, 침팬지와의 공통조상과 그 위로 더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이 같은 특징을 가졌습니다. 침팬지의 모든 조상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분류학자들이 어떻게 영장류를 나누는지와 무관하게, 오늘날의 침팬지와 먼 과거에는 이런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만약 과거의 영장류들이 오늘날 까지 모두 살아 있다면 도덕주의자들은 그들의 본질주의를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며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특별하게 구별하는 습관 역시 버렸을 것입니다. 낙태는 살인이 아니라 침팬지나 다른 동물을 죽이는것과 같이 여겨졌을 것입니다. 사실 신경계가 발달하지 않은 초기단계의 태아는 어떤 공포와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한 다 큰 돼지를 죽일 때 이들보더 더 도덕적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주의자들은, 진화와 다른 점진적인 현실의 관점에서 분명히 무의미한 ‘인간’의 정의와(낙태와 동물권의 논쟁에서) ‘생명’의 정의(안락사와 삶과 죽음의 경계문제에서)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빈곤의 기준을 정의하고 누군가가 그 기준을 만족하는지를 따집니다. 그러나 가난은 연속적인 것입니다. 왜 우리는 누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미국의 비상식적인 대통령 선거제도는 본질주의적 사고의 향연을 보여줍니다. 플로리다는 온 주민이 거의 동일한 표를 양당에 던짐에도 불구하고 한 주 전체가 공화당 또는 민주당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한 주가 본질적으로 공화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이 플라톤의 죽은 사고방식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며 도덕적으로는 유해합니다. 본질주의야말로 이제는 버려야 할 사고방식입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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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도킨스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인간, 태아, 배아로 어떤 시점에서 분절적으로 나뉘는 것은 본질주의적 사고자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중년과 노년을 분명히 나눌 수는 없지만 노령연금을 받을 나이를 분명히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요.
dasida 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분명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킨스의 의견을 노령연금에 적용해본다면, 노령연금을 나이에 따라 세분화해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얼마를 받을 것인가 역시 가진 재산에 따라 세분화 할 수 있구요. 이렇게 된다면 노령연금과 빈곤층 지원이 하나로 합쳐지는 통합적 복지의 효과도 나타나겠지요.
물론, 지금까지는 이러한 '복잡한' 제도는 행정적 처리비용의 증가 같은 현실적 문제로 인해 가능하기 않았을 것입니다만, 시스템 전산화같은 기술의 발전은 적어도 비용의 관점에서는 이를 다시 논의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점에 공감하고,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재밌는 주장을 읽은 적 있습니다. 예전에 레오 카츠의 '법은 왜 부조리한가'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 법이 분절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나름의 논리로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요.
저는 그 부분을 이렇게 요약해 두었었어요.
- '이를테면 법이 임신 후 온전한 생명체로 태어나기까지 생명을 연속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수정 후 29일까지는 생명 아님, 30일부터는 생명’ 이런 식으로 양분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형량의 관점에서 모든 죄는 무엇이 더 중한가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1일된 수정체를 파괴하는 게 더 나쁜가 한 사람의 수능 시험을 방해하는 것이 더 나쁜가, 아마도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2일된 수정체 파괴와 2명에 대한 시험 방해는? 이것도 후자.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밀고나가서 영아 살해와 1000명의 시험 방해 중 후자가 더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가치를 법의 잣대라는 공통의 판단준거로 통합되어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가치가 비연속적으로 도약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신선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법적으로는 태아가 언제부터 인간이고 언제부터 우리는 노인인지 규정해야겠지만
많은 경우 그런 기준을 놓는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되겠죠..
annie 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글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Leebong 님. ^^
"사실 신경계가 발달하지 않은 초기단계의 태아는 어떤 공포와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한 다 큰 돼지를 죽일 때 이들보더 더 도덕적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
그렇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한" 생명체를 마취시키고 죽인다면 "도덕적 부담을" 덜 느껴도 될까요? 저는 아직까진 여기에 회의적입니다. 고통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존재에 대한 죽음에 우리는 더 도덕적 부담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한 "인간"이라는 규정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인류의 안정된 연속을 보장하기 위해서, 인류가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에 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detour 님, 날카로운 지적 감사합니다.
짧게 표현된 도킨스의 입장을 나름대로 변호해 본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상의 '고통'은 매우 중요한 기준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의 '고통'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공리주의적' 사고에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생명체)를 마취시킨 후 죽였을 때, 사회전체의 이득과 고통의 양은 그 인간(생명체)의 실종으로 인해 그 인간의 주변의 인간(생명체)이 느낄 이득과 고통을 모두 합한 양으로 표현할 수 있고, 그 인간(생명체)의 죽음으로 인한 이득이 더 클 때 사회적으로 이를 용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흉악한 범죄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이러한 관점에서 지지될 수 있으며 낙태 역시 출산을 강요했을 때 태아와 태아의 주변인의 미래의 이득이 크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습니다.
안락사 역시 남은 기간의 본인과 주변인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하는 목적이 있으며, 연쇄살인범들을 연쇄살인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미국 드라마 Dexter 도 이런 관점에서 대중의 부담감을 피하고 있습니다.
이를 다른말로 맥락 또는 상황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느낄 도덕적 부담은 여기에 더 의존함은 물론이구요.
따라서, detour 님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꼭 죽여야 한다면, 마취를 시킨 후 죽이는 것이 '도덕적 부담'을 덜 느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사실 저희 블로그를 오랬동안 지켜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오늘날 과학계는 유물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에 물질적 차이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도킨스의 의견 역시 이를 바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적 사고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바로 "사회전체의 이득 대 그 생명체의 실종으로 인한 이득과 고통" 등을 정량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좀더 나아가 어떤 생명체의 죽음으로 인한 '이득'이란 결국 그 생명체가 죽기 전까지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해서 비교하려는 반사실비교 (counterfactual analysis)가 있어야하는데 불가능한 것이죠. 예로 한 때 낙태문제로 크게 친구와 다툰 적이 있었는데, 친구에 의하면 '보통 낙태를 고려하는 집안사정/편부모/임신한 10대 등이 아이를 키울 경우 사회경제적 이유 때문에 아이가 사회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라게 되거나 불행할 확률이 높으며, 그 비용보다 빠르게 낙태하는 것이 공리적으로 더 이득이다' 라는 주장이 크게 불쾌했었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생명체가 앞으로 어떻게 될것인지,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상황을 정량지어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유병훈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비교가능'의 문제점은 공리주의적 사고의 한계라기보다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한계일것입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누군가는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하지요. '어떤 것들은 비교 불가능하다'라는 표현은 분명 우리의 인간성에 강한 내적 호소력을 가진 표현이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이러한 비교가 늘상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글에 그런 이야기들이 잘 나와있지요. 인간을 분류하고 확률에 바탕해 각각에 대한 생명의 가치를 계산하지 않을 경우 결과적으로 한 명을 구하기위해 10만명이 희생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않겠다는 판단 자체가 이미 또다른 (덜 합리적인) 우선순위에 굴복하는 결정인 것입니다.
멋진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Ivo 님, 감사합니다. ^^
뉴스페퍼민트의 입장은 유물론이라기 보다는 물질론,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어 하나의 차이지만...
고등학교 수학 시간,
1에서 2로 넘어가는 순간이 있는가? 에 대한 고민을 했던적이있었습니다.
본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순간을 찾아 끊임없이 고민하고만 잊지 않을까 싶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낙태사건에 대한 도킨스의 트위터 사건이후로 수위를 낮춘 경향이 일면 보이는 글인가요...
문제의 본질은 태아가 인간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태아로부터 빼앗는 것이 '인간의 삶' 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산재로 죽으면 그가 죽지 않았다면 평생동안 벌 수 있었을 수익을 산정합니다. 단지 그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일어날 일들을 고려하는 것이죠.
태아가 인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태아를 죽임으로서 사라진 것은 분명 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자위행위를 하면 역시 수많은 인간의 삶이 사라지는 건가요?
남자가 자위행위를 해서 나오는 정자는 애초에 난자에 들어가 생명이 될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은 정자지만, 여성과 접촉이 충분히 예상이 되는 상황에서 분출된 정자는 소년이든 소녀든 충분히 하나의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 목적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태아로부터 빼앗는 것과 자위행위를 하며 나온 정자를 같은 선상에 볼 수는 없지요.
도킨스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산재로 죽었을 때 그가 죽지 않았다면 벌 수 있었을 수익을 산정하지요. 바로 한 생명이 살아남았을 때 가져올 가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명의 생명을 지킴으로서 그것이 가져왔을 수많은 가능성을 누가 보상해줄건가요.
제 생각에는, 태아는 가능성이 있는만큼 아직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가능성'일 뿐이지만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경우 그가 태어나 '인간'으로서 행동했던 시간의 가치, 노동자 이전에 인간이 되어 행동했던 시간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