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12월 18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미국 언론의 사명 가운데 “기계적인 정치적 중립”은 없습니다. 이번에 공화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으니, 다음에는 민주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원칙 같은 건 없다는 말입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팩트체크를 거쳐 진실을 보도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그러다 보면 어떤 사안이든 일관되고 공정한 잣대로 취재하고 분석해 보도할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신문들은 아예 선거 전에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하죠. 오피니언란에 올라오는 칼럼에서는 그 언론사의 논조가 아무래도 더 분명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란에는 최근의 거시경제를 설명해 주는 글이 자주 올라옵니다. 이런 칼럼들은 대개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결론으로 글을 맺곤 합니다. 구구절절 드는 이유를 읽다 보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다가도 한편으론 주변 사람들 사는 모습은 여전히 팍팍해 보이던데 경제가 정말 잘 돌아가고 있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의 원인을 잘못 알고 있으니, 그걸 바로잡아 보려고 한 것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 대부분이 그렇지만, 뉴욕타임스도 트럼프 전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 필진도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이들이 바이든 행정부를 무조건 옹호하는 글을 쓰지는 않지만, 바이든 대통령과 행정부가 과도한 비판을 받는다고 여기는 부분에 관해선 정부를 변호하는 논조의 글을 자주 씁니다. 경제에 관해선 폴 크루그먼이 대표적입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나쁘지 않다며 짐짓 독자들을 꾸짖는 듯한 톤의 글이 올라오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개운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경제학자들의 친절한 설명은 일반 사람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체감 경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럼을 읽다 보면 종종 어딘가 허전할 때도 있고, 심지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트리시 맥밀란 커텀이 쓴 이번 칼럼을 읽고 여기에 관한 궁금증이 상당 부분 해소됐습니다.
전문 번역: ‘체감상 불경기’? 미국 경제가 직면한 더 큰 문제들
우선 이 글을 “오컴의 면도날” 원칙에 따라 이해하는 건 잘못입니다. 각종 지표와 숫자, 데이터를 동원해 지금의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게 문제일 수 있는 건 그 설명이 복잡해서가 아닙니다. 트리시 맥밀란 커텀은 단순한 설명이 가장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시적인 지표에 갇혀서 복잡하고 어려운 계산을 바탕으로 한 분석과 예측을 내놓는 데 신경 쓰느라 정작 누구나 매일 같이 생활세계에서 겪는 어려움과 부침을 못 보다 보니, ‘반쪽짜리 설명’이 나온 건 아닌지 돌아보자는 게 칼럼의 주장입니다.
칼럼에 소개된 여러 사례에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어렵잖게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소하게 불편한 것들이 의외로 일상을 지배하는 경우가 살다 보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상황을 생각해 보죠. 미국은 원래 육아휴직 제도가 법으로 보장돼 있지 않습니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 육아휴직 제도는 단연 가장 후진 나라가 미국입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비용도 믿을 수 없이 비쌉니다. 그나마 덜 비싼 곳이 없지 않지만, 이런 곳은 경쟁률이 너무 높아서 기약 없이 대기만 하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나이까지 자리가 안 날 때도 있습니다. 팬데믹도 끝났으니, 재택근무도 끝내자며 출근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회사에 다니는 부모가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는 낮은 실업률이나 높은 임금 인상률 같은 거시경제 지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저히 포착하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필수 노동’을 포착하지 못하는 지표
사회를 꾸려 가는 데 필요한 노동을 지칭하는 말은 칼럼에도 여러 가지가 등장합니다. 숨겨진 노동(hidden labor), 보이지 않는 노동(invisible labor), 그리고 사람들이 가계 단위에서 직접 알아서 하는 노동이란 뜻에서 “D.I.Y. 노동”이란 표현도 썼습니다. 가사 노동의 상당 부분은 여성이 여전히 절반 이상을 맡은 돌봄 노동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을 위한 노동과 제도적 지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고, 이 모든 걸 필수 노동(essential labor)이라 불러도 뜻을 전달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 성적표를 변호하는 칼럼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경제학자와 전문가, 칼럼니스트들은 일제히 다양한 거시경제 지표를 근거로 들며 경제가 잘 굴러가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 지표들은 필수 노동의 어려움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하지만 지표를 구하는 토대가 되는 노동과 생산, 소비 못지않게 중요한 필수 노동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체감상 불경기’가 계속되는 현상을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판단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한 번 더 생각해 볼까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맡는지 생각해 보면 미국과 다른 나라의 차이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대부분 가족과 사회, 정부 등 공동체가 함께 아이를 키웁니다. 미국에선 이 필수 노동을 가정에 전적으로 맡겨 놓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D.I.Y.(Do It Yourself) 정신이 애꿎은 데서도 발휘되는 겁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긴급히 시행된 미국 구제계획(American Rescue Plan)은 미국인에게 전염병의 충격 못지않게 놀라운 세상을 보여줬습니다. 흔히 다른 선진국에서는 공공 부문이 책임지고 해결할 문제까지 시장에 내맡긴 경우가 많은 미국에서, 그래서 사회적 안전망이 매우 빈약한 미국에서 갑자기 강력한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정부가 세금을 들여 지원한 덕분에 팬데믹 초기 실업률이 20%에 육박하고, 경제가 완전 멈추고 돈이 돌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지표만큼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 구제계획은 ‘필수 노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법안이었던 셈입니다. 잠시나마 정부 지원으로 필수 노동의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다시 그 짐을 스스로 알아서 지라고 던져놓고 정부는 나 몰라라 하는 상황입니다. 상대적으로 여당인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에 불만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2024 대선과 필수 노동
재선에 도전하는 바이든 선거 캠프가 ‘체감상 불경기’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분석한 것처럼 ‘일반 대중이 경제 지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착각에 빠져 있다’고 여기고 있다면, 적어도 경제라는 이슈로 투표장에 오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바이든은 트럼프(나 다른 공화당 후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진짜 문제가 뭔지 모르는 건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유권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데이터를 통해서만 들여다보는 전문가들과 그들의 말만 듣는 위정자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때 세상은 필수 노동자들을 영웅으로 그리며 칭송했습니다.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듣기 좋은 말만 한 게 아니라, 불편하고 힘들었던 점들을 제도적으로 개선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동안은 엔진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연료만 신경 쓰고, 그 부품이나 부품에 윤활유를 바르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팬데믹을 계기로 부품과 윤활유도 대대적으로 정비했던 겁니다. 코로나19가 끝났다고 다시 필수 노동을 등한시하는 사회로 돌아간다면, 정치권과 유권자들의 괴리는 더 커지고 말 겁니다. 트럼프와 공화당이 주창하는 경제 정책도 바이든을 공격하는 게 목적일 뿐 필수 노동을 존중하고 우대하는 정책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는 사실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데이터를 잘만 분석해 필요한 정책 제안까지 내놓는 전문가들이 이해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자명한 문제에 눈을 감고 어려운 설명에만 매달린 전문가들의 오만함이 빚어낸 커다란 사각지대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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