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9월 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스브스프리미엄 앱에서도 저희가 쓴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지형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용어를 정의하는 문제 때문에 곤란해질 때가 있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정당을 좌파로, 보수적인 성향의 정당을 우파로 부를 수 있다면, 미국 민주당은 진보 정당이고, 공화당은 보수 정당일까요? 크게 보면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정확한 분류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좌우를 나누는 분류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유럽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유럽이라고 해도 나라마다 정당의 역사와 정치 지형이 다를 테니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노동조합을 확고한 지지 근간으로 삼거나 많은 수정과 타협을 거쳤을지언정 한때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했던 정당에 대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또 유럽의 우파 정당들은 시장의 문제는 시장이 알아서 해결하는 편을 상대적으로 선호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복지 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안전망을 튼튼히 관리하는 데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정당은 없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분류법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 민주당은 진보 정당으로 보기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민주당 안에서 유럽의 좌파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아 코르테스 하원의원은 주변부 취급을 받죠. 미국 민주당의 성향을 영어로 “리버럴(liberal)”, 즉 자유주의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그냥 진보적이라고 옮기면, 유럽의 진보 정당과 닮은 점을 찾기 어려워서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경제 정책에 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미국 민주당은 유럽의 좌파 정당보다 중도 우파 정당과 더 닮았습니다.
공화당은 어떨까요? 공화당 지지층 가운데는 유럽의 중도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과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여전히 많지만, 특히 트럼프 시대 이후 정치인들의 행보만 놓고 본다면, 지금 미국 공화당과 비슷한 정당은 유럽의 중도 정당이 아니라 극우 정당에서 찾아야 할 겁니다. 한편, 유럽에서도 이민자에 대한 태도나 문화적인 요인에 관한 의견이 정치적 균열의 중요한 잣대가 되면서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높아졌고, 기존의 좌우 분류법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깜짝 당선된 해에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통과된 사건이 상징적이죠.
어찌 보면 서로 다른 나라 정당의 성향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릅니다. 정당 정치가 발전한 역사, 경제적 상황, 유권자의 수준, 선거 제도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나라마다 다른 지금의 정치 지형이 생겨났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미국 민주당의 성향을 표현하는 “리버럴”이란 단어의 모호함’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글을 시작한 이유는 “자유”나 “자유주의”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던 차에, 뉴욕타임스에 다음 칼럼이 실렸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의 역사를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거칠게 대략의 흐름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자유주의라 부를 수 있는 정치 사조가 태동한 건 18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미국의 독립과 건국이나 프랑스 혁명이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 내세운 새로운 사상을 반영한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련의 자유주의 혁명, 운동이 추구하던 자유란 압제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압제란 전제 군주이기도 하고, 교황과 성직자의 기득권으로 대표되는 종교이기도 했습니다. 유럽 근대국가 안에서는 신분제가 약화했고, 미국은 처음부터 헌법에 전제 군주를 용납하지 않는 국가를 지향한다고 천명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영향력이 커졌고, 정치적으로 신민 아닌 시민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추구한 자유는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여성은 전제 군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민의 범주 밖에 있었고, 군주 없이 평등한 사회를 꾸리겠다는 내용의 헌법을 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른 인종을 노예로 부리던 노예 소유주였습니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는데, 자유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끌어안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산업혁명으로 크게 불어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기존의 전제 군주나 토착 기득권 세력을 끌어내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자유주의가 이용되기도 합니다. 피식민지 사람들은 겉으로 자유를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에 자유를 빼앗긴 셈이죠.
전 세계에 식민지로 삼을 만한 곳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서구 열강들끼리 두 차례 큰 전쟁을 벌입니다. 이때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나라들의 주적은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앞세운 나치 독일이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일본 제국이었습니다.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파시즘과 싸웠습니다. 서구 유럽의 당시 국내 사정을 보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가 꾸준히 일어나면서 이들의 협조 없이 전쟁을 치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많은 것이 바뀝니다. 모인 교수가 칼럼에 썼듯이 냉전은 자유주의자들에게 “파시즘에 맞서 함께 싸운 동지 공산주의자들이 무서운 적으로 변하는 시대”의 도래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적이 된 상대방의 잔재를 소탕한다는 명목하에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 자유를 많이 축소하고 억압합니다. 말의 뜻부터 자유주의와는 지극히 모순일 수밖에 없는 “사상 검증”이 그야말로 기승을 부린 시대가 자유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의 1950년대였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신 분들이라면, 매카시즘의 광풍이 어땠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을 겁니다. 생각이 다른 이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고 마녀사냥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이들이 스스로 자유를 수호하는 투사라고 하던 시절입니다.
여러 번 놓친 기회
모인 교수는 오늘날 자유주의가 탄탄한 철학적, 사상적 근거를 잃고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을 냉전 시대에서 찾습니다. 전제 군주, 종교 등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던 소극적 자유에서 어떤 대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 (다른 이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적극적 자유를 향해 나가야 했던 시점에 냉전이 오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겁니다. 냉전 시대 자유주의는 우리 안의 적인 공산주의를 색출해 척결하는 극단적인 억압의 기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잇따라 개혁, 개방 노선을 택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주의자들은 잽싸게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습니다. 수십 년간 벌여 온 경쟁에서 이겼으니, 이를 자축하는 건 좋은데, 이때야말로 냉전이 끝난 시점에 인류가 지향해야 할 철학적, 사상적 기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인 교수가 또 한 번 안타까워하듯 우리는 “자유주의 사상이 지닌 해방의 잠재력”을 다시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데 소홀했습니다. 사실 해방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주창한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더 아쉽기도 합니다. 벌써 100년이 다 되어 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도 계급 해방을 내건 자유주의의 약속을 크게 진척시킨 정책이었습니다.
자유주의는 냉전 시대를 거치며 잔뜩 왜곡되고 망가진 채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트럼프와 바이든은 하나부터 열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으면서도 중국을 향한 견제, 압박, 대결로 일관하는 외교 정책 기조는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탈냉전 시대에는 ‘철 지난 색깔론’을 들먹인다는 비판이라도 받았지, ‘신냉전’ 시대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 들어서는 노골적인 색깔론이 더 버젓이 활개를 치는 듯합니다.
이번에도 색깔론은 어김없이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자유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는 권한을 독점한 채 다른 이의 자유를 끝없이 억압하는 이들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자유주의의 쇄신은 요원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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