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4월 24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아직 2023년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제 마음속 ‘올해의 책 후보’에 오른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가 지난해 펴낸 책으로, 실제 해방 공간 전라남도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조문객으로 온 이들과 주변 사람들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과 그 삶을 돌아본 책입니다. 올해 초 한국에 갔다가 우연히 집어 들었는데, 정말 재밌어서 뉴욕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 읽고, 아내와 주변 친구들에게도 추천했습니다.
“근데 그거 소설이더라!”
저와 마찬가지로 책을 재밌게 읽은 아내가 하루는 책에 관한 기사, 서평을 찾아보다가 이 책의 대단한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귀띔해 줬습니다. 사실 책 표지에 떡하니 장편소설이라고 쓰여 있으니 대단한 발견도 아니지만, 그 말을 듣고 저도 흠칫 놀랐습니다.
‘아니 뭐야, 그럼, 그 많은 이야기들을 작가가 다 머릿속에서 상상해서 만들어 낸 거란 말이야? 그렇게 현실적인 묘사들이 온전히 다 작가의 상상력에 필력으로 뽑은 작품이라고? 그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 지어낸 이야기일까?’
끊이지 않던 궁금증과 고민은 스브스프리미엄에 실린 정지아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해소됐습니다. 정지아 작가가 30년도 더 전에 펴낸 책 “빨치산의 딸”과 비교해 보면 “아버지의 해방일지” 장르를 장편소설로 표시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빨치산의 딸”은 빨치산 투쟁의 역사를 철저한 고증을 거친 사실만 모아 기록한 책입니다.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단 한 톨의 허구도 허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재미도 덜 했을 테고, 시절이 시절인 만큼 금서로 지정되고 맙니다. 금서가 해제되기까지는 15년이 걸렸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도 돌아가신 마당에 조문객으로 온 (상당수 작가는 생전 처음 만나는) 이들과의 인연, 기억, 이야기를 일일이 고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지아 작가는 처음부터 힘을 빼고 소설을 썼을 겁니다. 책에 등장하는 대화와 묘사들이 생생하고 진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물론 작가의 필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진짜 일어난 역사를 뼈대로 이야기를 구성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배경, 관계, 사건을 창작해 쓰는 소설도 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거기에 살을 붙이고 구멍 난 기억은 상상력과 글솜씨로 채워 넣은 글도 소설입니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마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예로 생각하고 쓴 것 같은 칼럼이 한 편 실렸습니다.
전문번역: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녀들이 전하는 ‘간접흡연 효과’와 역사의 증언
소설에 담긴 역사, 소설로 읽는 역사
다프네 칼로테이는 실제 일어난 역사를 이야기로 엮어 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작가이자 소설가입니다. 정지아 작가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쓸 운명이었던 것처럼, 칼로테이가 자연스럽게, 운명적으로 글의 소재, 주제로 삼게 된 건 바로 홀로코스트.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입니다. 이유는 비슷합니다. 작가 칼로테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집안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칼로테이의 아버지는 나치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던 시절에 태어나긴 했지만, 아직 너무 어렸습니다. 대신 할머니, 삼촌, 고모 등 숱한 고초를 겪고 살아남아 그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척들이 칼로테이 집안에는 많았습니다.
칼로테이는 이야기 곳곳에 가족이 들려준 홀로코스트에 관한 소재를 끼워 넣는데, 장르 상 소설로 분류되는 글을 쓰다 보면 오해를 사는 일이 많다고 말합니다. 마치 소설은 전부 다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 아닌 편견 말입니다. 저도 비슷한 오해를 했던 셈입니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고 부정하려는 세력이 바로 이 오해를 빌미 삼아 각종 혐오와 선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엄연히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허구로 매도하는 것 말이죠.
칼로테이와 같은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증언하는 증인이 아니라, 그 일을 겪은 이가 한 말을 옮기고 전하는 간접적인 증인입니다. 어떤 사건이든 세월이 흐르면 그 일을 직접 겪은 이는 세상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직접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죠. 그러나 칼로테이는 오히려 그럴수록 2세, 3세 혹은 주변 사람들이 역사를 더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는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것과 몇 년 차이를 두지 않고 한반도에서도 참혹한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이 그렇고, 몇 년 뒤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화를 면하고 살아남은 어린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이미 80세를 넘긴 노인입니다. 갈수록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직접 증언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4.3 사건은 주로 제주도에 한해 일어난 비극이지만, 한반도 전역에 한국전쟁의 포화를 비껴 간 곳은 거의 없습니다. 즉,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전쟁의 화를 면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전쟁통에 피난길이 어땠는지 이야기해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보고 들은 이야기가 전쟁의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겠지만,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그 기억을 직접 물어볼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어디에 적어두거나 녹음이라도 해둘 걸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합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겪은 세대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면, 그들의 기억과 경험을 보존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건 다음 세대의 몫입니다. 이때 그 기억과 경험을 잇고 엮는 훌륭한 수단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아이히만 재판에서 찾을 수 없던 답
실은 이번 주 뉴욕타임스에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흥미로운 칼럼이 한 편 더 실렸습니다. 바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고찰한 계기가 된 아돌프 아이히만 전범 재판(1961년)에 관한 칼럼입니다. 칼럼을 쓴 톰 후르비츠는 당시 14살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역사적인 재판을 직접 볼 수 있던 건 후르비츠의 아버지가 바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재판을 촬영해 전 세계로 송출하는 일을 총괄한 방송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르비츠는 역사적인 재판을 무사히 송출한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말하면서도 재판이 끝내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두가 답해야 하는 무겁고 근본적인 질문을 건드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합니다. 그 질문은 간단합니다.
도대체 파시즘은 무엇이길래 발호한 걸까? 왜 이를 막지 못했나?
권위주의와 파시즘은 이후로도 사그라지지 않았고, 전 세계적으로 오히려 꾸준히 세를 불리고 있으니,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한, 오히려 더욱 논의가 시급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아직도 휴전 상태인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을지 고찰해보지 못했습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게 물론 즐겁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을 겁니다. 또 그 기억을 자칫 잘못 꺼냈다가는 괜히 화를 입을 수 있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금부터라도 기억과 경험을 보존하고 이어가려면 다음 세대가 더 많은 이야기를 모으고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을 모으고 엮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비단 작가나 역사가만의 책무가 아닙니다. 2023년 한반도를 사는 우리 모두가 책무로 여겨도 좋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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