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 전에 써놓고 투표 결과가 나온 뒤 내용을 일부 변경해 올렸던 글입니다.
17.8% (2002) -> 33.9% (2017) -> ?? (2022)
오늘은 프랑스 대선을 분석한 글을 준비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프랑스 국민이 한창 투표하고 있을 시간으로, 아직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투표함을 열어보지 않아도 2022년 선거는 프랑스 제5 공화국 역사에서 극우 정당 후보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선거로 기록될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위의 물음표에 들어갈 숫자는 45 안팎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숫자가 50이 넘어간다면 오늘 프랑스 대선은 브렉시트나 트럼프의 당선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르펜의 득표율이 50%를 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50%에 육박하는 표를 얻은 것만으로도 여전히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찬찬히 따져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오늘은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고전한 이유, 르펜 후보가 선전한 이유를 미리 짚어보려 합니다. 투표 결과가 나온 뒤 (물음표로 써둔 득표율을 채워 넣는 것 외에) 필요하면 한 차례 글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25일 새벽 3시 반 수정: 르펜 후보의 득표율은 41.5%로 여론조사에서 예상됐던 것보다는 낮았습니다. 이제 막 개표가 시작됐지만,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입니다.
** 25일 아침 10시에 제목도 지금의 제목으로 수정했습니다. 원래 글 제목은 “개표 전에 미리 분석하는 프랑스 대선”이었습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두 번 합니다. 먼저 1차 투표에서 가장 선호하는 후보를 뽑습니다.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없으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두 후보가 2주 뒤 결선 투표를 치릅니다. 무효표를 제외하고 득표율을 계산하기 때문에 양자 대결에서 이긴 후보는 과반의 지지를 받은 당선자가 됩니다.
1972년 장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이 세운 국민전선(FN, Front National)은 오랫동안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극우 정당이었습니다. 2002년 1차 투표에서 좌파 후보들이 난립하는 바람에 깜짝 2위를 차지한 르펜이 결선 투표에 올랐지만, 프랑스 국민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극우 정당은 용납할 수 없다며, 시라크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줬습니다. 1차 투표에서 480만 표, 16.9%의 득표율을 기록한 르펜은 결선 투표에서 고작 70만 표를 더 받는 데 그쳤습니다. 반대로 시라크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566만 표, 19.9%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2천만 표를 더 받아 82.2%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시계를 15년 뒤로 돌려보죠. 2017년 대선에서 장마리 르펜의 딸 마린 르펜(Marine Le Pen)은 국민전선 역사상 두 번째로 결선 투표에 오릅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기성 정당들이 내홍을 겪는 사이 정치 개혁을 표방한 정치 신인 에마누엘 마크롱이 대통령이 됐지만, 르펜은 아버지의 두 배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죠. 이때도 마크롱은 1차 투표보다 1,200만 표를 얻은 데 반해 르펜은 1차 투표보다 300만 표를 더 얻는 데 그쳤습니다. 그래도 분명 15년 전보다 지지 기반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었죠. 이름을 국민연합(RN, Rassemblement national)으로 바꾼 르펜의 극우 정당은 오늘 자신이 엄연한 프랑스의 주요 정치 세력이 됐음을 입증했습니다.
5년 사이 무엇이 달라졌는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뉴욕타임스 팟캐스트 데일리의 분석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마크롱의 감점 요인
5년 전 마린 르펜이 (결선 투표에서) 33.9%를 득표했다는 건 마크롱이 66.1%의 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마크롱 대통령이 60% 넘는 표를 받을 거로 예측하는 여론조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가장 선호하는 후보를 뽑는 1차 투표와 달리 “최악을 막는” 투표를 하는 결선 투표에서도 “극우 정당은 무조건 막고 보자”는 심리가 예전처럼 확고하지 않아 보입니다. 극우 정당에 차마 표를 주지 못하는 유권자 가운데 마크롱도 너무 별로라서 아예 결선 투표에 기권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1차 투표에서 좌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La France Insoumise)의 장뤼크 멜랑숑(Jean-Luc Mélenchon) 후보가 받은 770만 표(22%) 가운데 적잖은 표가 마크롱, 르펜 누구에게도 가지 않는 기권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집권 당시 심화하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집권 내내 노동자 해고를 쉽게 하는 친기업 정책이나 부유세 축소 등 부자들만 위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오히려 심해졌고, 국민들의 불만은 노란 조끼(gilets jeaunes) 운동으로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시위의 발단은 유류세 인상이었는데, 마크롱 대통령은 시위 초기에는 서민들이 왜 정책에 반대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실언을 일삼아 “대통령이 아니라 제우스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본인이 그랑제꼴을 나온 엘리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늘 남을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는 마크롱이 대중의 호감을 잃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의 정책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크롱은 노란 조끼 운동의 요구 사항을 뒤늦게나마 받아들였고, 프랑스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위기도 그럭저럭 잘 버텨낸 편에 속합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기름값을 비롯한 물가가 다시 폭등했습니다. 불황 속에 치르는 선거는 원래 여당과 재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르펜의 득점 요인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듯이 국민연합은 국민전선에서 이름만 바꿨을 뿐 여전히 당의 기조, 가치, 지향점은 반이민, 국수주의로 점철된 극우 정당입니다. 그런데 르펜은 이번에는 5년 전 마크롱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고 돌아선 이들 가운데 특히 서민, 노동자 계급의 마음을 얻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는 르펜이 잘해서라기보다 마크롱이 잘 못해서 상대적으로 점수를 얻은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민자, 특히 무슬림을 향한 강경 발언은 지난 몇 년 사이 프랑스를 충격에 빠트린 몇몇 사건 덕분에 르펜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분야입니다. 프랑스에 사는 무슬림 인구는 600만 명이 넘습니다. 인구의 10%가 무슬림인 프랑스는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입니다.
프랑스에서 무슬림이 자행한 테러 공격이 잦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바타클랑 극장 테러 등 희생자가 많이 나온 대형 테러 공격이나 충격적인 사건의 범인이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이슬람교를 테러리스트의 종교로 칭하고 무슬림과 폭력을 연관 지어 온 르펜의 지지율은 올랐습니다. 특히 지난 2020년, 수업 시간에 이슬람교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풍자한 샤를리 엡도의 만평을 보여줬다가 이슬람 극단주의자 10대 소년에게 참수당한 중학교 교사 사뮈엘 파티 사건은 프랑스를 충격에 빠트렸으며, 무슬림에 대한 혐오가 늘어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러시아와 푸틴
세계 2차대전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당연히 프랑스 대선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푸틴의 전쟁은 마크롱과 르펜 두 후보에게 모두 악재였습니다.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 대통령은 마침 올해 상반기 프랑스가 유럽연합 정상회의(European Council) 순번 의장국인 덕분에 유럽의 평화를 책임지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프랑스 내부에선 일찌감치 재선에 공식적으로 도전할 의사를 밝히던 관행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동분서주하며 외교력을 뽐내려는 꼼수를 부리는 마크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어쨌든 임박한 전쟁을 막아냈다면 마크롱은 분명 적어도 르펜과 외교 분야의 토론을 할 때만큼은 큰소리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푸틴은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유럽연합 각국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이 몰려왔습니다.
르펜은 푸틴에 관한 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유럽연합과 유로존 탈퇴를 공약하며 “유럽 통합보다 프랑스만의 길”을 부르짖은 르펜은 푸틴과 매우 가까운 사이를 유지해 왔습니다. 2014년에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민전선은 러시아 은행으로부터 1,200만 달러의 차관을 받았습니다. 아직 이 돈을 다 안 갚았기 때문에 마크롱은 르펜을 향해 TV 토론 내내 러시아의 돈에 종속된 꼭두각시 이미지를 씌우려 했습니다. 채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르펜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했을 때도 이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2017년 대선 때는 1차 투표 직전에 모스크바를 깜짝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우애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는 상황에서 르펜은 푸틴과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한창인데도 지난주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우크라이나 상황에 따라 프랑스가 먼저 러시아와 화해를 제안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마크롱을 비롯한 유럽연합 정상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도 했습니다. 또 나토(NATO)에서 탈퇴하지는 않겠지만, 프랑스군을 나토 연합사령부의 지휘 아래 두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보다도 미국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푸틴을 비난하는 프랑스 국민도 폭등하는 기름값, 물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는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러시아가 수출하는 천연가스와 에너지에 적잖이 의존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측면에선 르펜이 푸틴의 러시아와 가깝다는 사실이 오히려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달라진 구도
2002년 한국 대선 토론의 구도를 기억하십니까? 당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존재로 노무현 후보가 보수 이회창 후보와 진보 권영길 후보 사이에 있는 중도로 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5년 뒤 2007년 대선 때는 주요 후보의 구도가 진보부터 보수 순으로 나열했을 때 정동영 – 이명박 – 이회창 순서였습니다. 이명박 후보가 중도 후보로 보이는 효과가 있었죠.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새로 등장한 후보, 정당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건 르펜, 국민연합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극우주의자 에릭 제무(Éric Zemmour)입니다. 프랑스판 폭스뉴스로 불리는 씨뉴스(CNews)에서 정치 평론을 하던 제무는 지난 10일 1차 투표에서 7%를 득표, 4위를 차지했습니다. 제무는 1차 투표가 끝난 뒤 결선 투표에서 르펜을 지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르펜이 지난번보다 결선 투표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제무를 찍은 사람이 결선 투표에서 마크롱을 뽑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워 보입니다.
물론 구도가 표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쪽 끝의 성향에 속하는 후보보다는 중도 후보가 득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르펜은 확실히 “제무보다는” 온건한 성향으로 보였는데, 이런 구도의 변화는 분명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드시 극우 성향이 아닌 유권자라도 막말이나 범죄에 가까운 혐오 발언을 일삼는 제무를 보다가 르펜을 떠올리면 르펜은 대통령에 좀 더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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