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팟캐스트 아메리카노 시즌3 세 번째 에피소드의 오프닝에서 언급한 칼럼을 소개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 “지금의 OO를 만든 OO날 밤” 같은 표현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룻밤 새, 혹은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 하나가 이후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피상적인 분석에 기대면 종종 그 일이 일어나게 된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맥락을 간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1973년 1월 22일, 미국을 바꿔버린 날(Jan. 22, 1973: The day that changed America)”이라는 칼럼 제목을 봤을 때 시쳇말로 ‘초를 많이 친’ 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길래 오늘날 미국이 그날 하루에 결정됐단 말인가?’
게다가 칼럼을 쓴 제임스 로베널트(James D. Robenalt) 변호사는 찾아보니 비슷한 제목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의심을 한가득 안은 채로 제목에 낚여 칼럼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예상대로 제목에 다소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갈라진 지금의 미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기를 꼽으라면 이즈음을 빼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제목에서 촛물을 좀 빼보자면, “1973년 1월 22일, 미국 사회의 정치적 분열이 싹을 틔운 날” 정도로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현재 대법원에서 검토 중인 판례 가운데 가장 많은 이목이 쏠린 사건이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포괄적으로 인정한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이죠. 대법원이 그 유명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한 날이 바로 1973년 1월 22일이었습니다. 또 1960년대와의 이별, 197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재선에 성공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사흘째인 이날 두 건 더 일어났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외의 두 사건은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베트남전 종전을 논의하기 위해 파리로 날아간 일, 그리고 닉슨의 전임자인 린든 존슨 대통령이 텍사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일입니다. 세 가지 사건은 모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현재 극도로 갈라진 미국 정치 지형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1960년대 미국을 관통하는 단어는 통합과 번영이었습니다.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고,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인류 최초로 사람을 달에 보냈으며, 민권법이 통과돼 더욱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죠. 그러나 물밑에선 분열과 쇠락의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먼저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과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이 제정됐다고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는 백인, 남성, 보수적인 종교 단체 등 기득권 세력의 불편함이 언제든 분열의 목소리로 표출될 수 있었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바싹 마른 장작에 불씨를 던진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전략적인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수렁에 빠진 베트남 전쟁은 막대한 군비 지출로 미국 경제에 엄청난 짐을 안겼습니다.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 임신중단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미국 사회를 얼마나 갈라놓았는지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저희집에서 장 보러 가는 길에는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건물이 있는데, (본사인지, 뉴욕 지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앞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처럼 늘 누군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이 좀 많아지는 날에는 가족계획연맹 직원 혹은 자원봉사자와 시위대가 언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1973년 1월 22일은 자발적인 임신중절을 인정할 수 없는 이들에게 쓰라린 패배와 치욕의 날이 됐고, 이듬해부터 1월 22일이 되면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Life)이라고 이름 붙인 임신중단 반대 시위는 지난해엔 코로나19 팬데믹에 의사당 테러 사건 이후 수도의 경비가 강화되면서 취소됐지만, 올해는 다시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보수 우위 구도로 재편된 대법원이 드디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리라는 희망에 체감온도 영하 10도의 추위를 뚫고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마스크 안 쓴 사람도 많았고, 정치적 성향과 교육 수준, 백신에 대한 태도 사이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면, 코로나19 백신을 안 맞은 사람도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코로나19 백신은 태아의 세포에서 배양, 생산됐다는 낭설을 퍼 나르며, “악마의 백신을 맞은 사람은 생명을 위한 행진에 올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1973년 1월 22일은 닉슨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닉슨 대통령은 사실 대법원판결보다도 파리로 향하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몇 년째 계속된 전쟁으로 미국 사회에서 세대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첫 임기에 베트남에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본 채 발을 뺄 수 있던 기회를 스스로 날린 닉슨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영예로운 평화 협정’으로 열고 싶어 했습니다. 명백한 패전을 어떻게든 ‘원만한 종전’으로 잘 포장해야 했는데, 그 중책을 맡은 키신저 장관의 파리행에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습니다.
타임지가 대법원이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판결을 할 거라는 단독 기사를 냈습니다. 워런 버거 대법원장은 언론에 정보를 흘린 취재원을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해서라도 색출해내자고 할 만큼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버거를 포함해 닉슨 대통령이 임명한 네 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 가운데 무려 세 명이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다수 의견에 찬성합니다. 닉슨 대통령도 대법원판결에 관해 보고를 받았지만, 자신이 임명한 보수 대법관이 내린 판결에 크게 개의치 않은 듯합니다. 오히려 보좌관이었던 척 콜슨에게 “흑인과 백인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면 낙태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개된 닉슨 대통령의 대화 내용을 보면, 지금이라면 입 밖에 내는 순간 매장되기 딱 좋은 인종차별 발언이 자주 나옵니다. 민권법이 제정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73년, 민주당의 텃밭이던 남부를 탈환한 공화당 대통령은 흑인에게 권리를 빼앗겼다고 느끼는 백인의 공허함을 어떤 의미에선 이미 체화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전 취임 연설에서 전임 린든 존슨 행정부가 내세웠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깎아내리며, 새로운 시대를 열겠노라 선언한 뒤였습니다.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케네디와 존슨으로 이어진 민주당 정부가 빈곤을 종식하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1960년대가 가고, 인종간 (또는 세대간, 성별간) 문화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49년 전 1월 22일이 더욱 상징적인 날로 기록된 건 1960년대를 상징하던 존슨 대통령이 이날 숨졌기 때문입니다. 존슨 대통령은 64세의 나이에 텍사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습니다. 존슨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너무 달랐던 닉슨 대통령은 전임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취임 기념 TV 대국민 담화 일정을 뒤로 미뤘습니다. 딱히 죽음을 애도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온통 “위대한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뿐일 연설을 장례식을 앞두고 하기가 내키지 않아서였습니다.
칼럼은 인종차별과 빈곤을 끝내고 더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미국식 진보’를 상징하던 존슨 대통령이 숨진 날,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오면서 정치적인 분열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더없이 완벽한 계기가 마련됐다고 지적합니다. 마침 그날은 초강대국 미국의 위용에 결정적인 금이 가기 시작한 베트남전의 패전을 공식화하는 작업이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어 트럼프의 당선과 여전한 영향력도 이날 상징적으로 시작된 분열의 정치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극도로 분열된 이유를 1973년 1월 22일 하루에 일어난 일에서 전부 다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날의 사건이 상징하는 시대의 변화는 분명 오늘날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지난 주말 워싱턴 D.C.를 메운 시위대가 외치던 바람처럼 대법원이 올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어 임신중단권을 제한할까요? 공화당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지난 대선의 패배를 딛고 분열의 구도를 발판 삼아 의회를 되찾아올 수 있을까요? 과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뉴스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하고 흥미로운 길잡이를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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