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Unintended Consequences”를 옮기면 “의도치 않은 결과” 정도가 됩니다. 삶에서 일이 의도한 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는 많지만, 특히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타나면 문제가 되곤 합니다. 때로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새로운 정책의 부작용이 너무 커서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정책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정책은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수립했느냐보다 결과로만 평가받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의도치 않은 결과’의 대표적인 사례로 21세기 들어 미국 공중보건의 최대 위기 중 하나로 꼽히는 오피오이드 위기(Opioid crisis)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오피오이드는 잘 알려진 대로 아편 성분이 든 합성 진통·마취제입니다. 그런데 약이 잘 듣는 만큼 중독 효과가 너무 강합니다. 결국, 미국의 수많은 저소득층이 오피오이드에 중독돼 너무 많이 죽는 끔찍한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오피오이드 중독에 의한 사망 또는 자살은 앵거스 디튼 교수가 언급한 ‘절망의 죽음’의 대표적인 유형에 들 정도입니다. 이미 오피오이드는 단순한 위기를 넘어 유행병(epidemic)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피오이드 위기가 생겨난 건 사람의 목숨이나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이윤만 좇은 대형 제약회사와 의료 윤리를 저버린 무도한 의사들 때문으로 보는 게 통념에 가까운 설명입니다. 실제로 환자들이 약물에 중독될 가능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처방을 남발한 것이 큰 문제였고, 그 기저에는 제약회사와 의료 기관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 행위, 이를 똑바로 규제하지 못한 규제 당국의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통념과 조금 다르지만, 통념을 보완할 수 있는 설명도 있습니다. 복스가 정책의 결과를 짚어보는 팟캐스트 임팩트(The Impact)에서 4년 전에 다뤘던 이야기에 여전히 새겨볼 만한 교훈이 있어 정리했습니다.
선더스의 삶과 주장, 그가 실제로 한 일을 보면 그는 분명 좋은 뜻으로 오피오이드를 처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선더스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데 혁신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으며,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줄여주는 걸 의료의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운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에 맞춰 많은 정책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도로 추진한 정책은 뜻한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오피오이드 위기의 시작이 환자의 고통에 더 집중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먼저 오피오이드의 작동 원리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피오이드와 뇌의 관계는 열쇠와 열쇠 구멍으로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오피오이드라는 열쇠로 뇌의 잠겨있는 문을 열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래서 고통을 잠시 잊거나 진정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 분비됩니다. 열쇠가 여러 개 있으면 더 많은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오랫동안 쓰다 보면 문을 더 여러 개 열어야 화학물질을 충분히 얻게 됩니다. 약물에 중독되는 거죠.
의사들은 오피오이드가 중독이 심한 약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 웬만해선 오피오이드를 처방하지 않으려고 한 것도 바로 중독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선더스였습니다.
의사의 의무 중 하나는 ‘죽음의 고통’을 줄여주는 겁니다. 물론 환자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병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료가 어려운 환자의 경우 남은 삶을 최대한 고통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의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 사이슬리 선더스
선더스의 주장은 영국과 미국 의료진 사이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호스피스(hospice) 병동에 머무는 말기 환자들에겐 중독이 큰 우려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줄여줄 수만 있다면 당장 잘 듣는 약을 처방하자는 주장에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었죠.
말기 환자가 느끼는 고통이 크긴 하지만, 말기 환자만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닙니다.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도 엄연히 고통을 느낍니다. 사실 20세기 미국 의사들은 대체로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인) 고통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줄여주기 위해 필요한 처치를 해야 한다는 의사들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환자에게 얼마나 아팠는지 물어봐 주는 의사가 흔치 않던 시절에 환자들은 ‘내 고통을 알아주는, 마음씨 따뜻한’ 의사들을 더 많이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감 능력 뛰어난 병원들에 환자가 더 몰렸습니다.
존스홉킨스 병원의 신경외과 의사 제임스 캠벨은 환자의 고통을 더 물어보는 의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996년 전미 고통 경감 의학회(American Pain Society) 회장직에 오릅니다. 캠벨은 그해 LA에서 열린 의학회 연례 회의에서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호흡, 체온, 맥박, 혈압과 같은 바이탈 사인(vital sign)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취지의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고통은 전혀 그만큼 중요한 지표로 취급받지 못했는데, 기조연설이 주목받자 전미 고통 경감 의학회는 아예 “고통은 다섯 번째 바이탈 사인”이라는 문구를 상표로 등록하고, 적극적인 캠페인을 벌입니다.
중독 병력이 없는 환자들은 새로운 약물에 중독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특히 편지 마지막에 나오는 저 문구는 제약회사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말이 됐습니다. 100단어 남짓한 편지가 저런 당돌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했을 리 없습니다. (벌써 이 글이 1천 단어가 넘었습니다.) 그러든 말든 제약회사들은 저 말을 대대적으로 인용하며,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아프다고 말하는 모든 환자에게 당장 처방해도 될 것처럼 광고했습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제약회사의 광고는 효과를 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환자들은 병원을 찾아와서 고통이 너무 심하니 잘 듣는 진통제를 달라고 의사들에게 애원했습니다. 일부 의사들은 중독 위험을 경고했지만, 환자들은 쉽게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의사를 찾을 수 있었기에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오피오이드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를 넘어 수많은 만성질환을 앓는 미국인들에게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제약회사들이 중독에 관해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는 건 지금의 오피오이드 위기가 초래한 결과가 말해줍니다.
가장 큰 책임은 분명 과학을 무시하고 사실을 날조한 제약회사와 이를 규제하지 못한 규제 당국에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러나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의사들의 좋은 취지가 이 위기의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지금 돌이켜봐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정책을 세우고 시행할 때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결과를 가지고 치열한 토론을 벌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피오이드 진통제면, 당장은 고통이 줄어들고 효과가 나타납니다. 아픈 사람을 돕는 걸 사명으로 삼는 의사들이 느끼는 보람은 분명 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럴수록 의사들은 과학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 약을 처방했을 때 환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엄밀하게 따지는 것, 그 결정을 내릴 때 동원되는 근거는 철저한 과학이 뒷받침하는 근거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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