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가장 많은 글을 쓴 주제는 아마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수천만 명의 미국인들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코로나19 백신이 충분히 보급된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여전히 안 맞고 있는 사람들을 2020년 대선 투표 성향과 엮어서 썼던 글도 결국 같은 얘기를 한 셈이고, 과학의 정치화나 과학을 불신하게 된 사람들에 관해 다룬 여러 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에서 현재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은 전체 인구의 63%입니다. (한국은 85%) 지난여름 백신 접종률이 50%를 넘었을 때 “맞을 사람은 이미 다 맞았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왔었는데,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나오고, 방역 대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백신을 맞기 싫은 사람 수천만 명은 끝내 백신을 맞지 않았습니다.
글의 제목에 썼듯이 백신을 안 맞는 사람들을 한데 묶어 비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중에는 충분히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사례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백신을 맞을 수 있는데 한 번도 안 맞은 사람이 6천만 명이 넘습니다. 백신에 대한 태도는 미국이란 나라를 이해하는 열쇳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백신 안 맞았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곧바로 저를 상종할 가치도 없는 안티 백서(anti-vaxxer, 백신 접종 거부자) 취급을 해요. 그런 거 아닙니다. 저 정신 나간 사람 아니에요.
아직 코로나19 백신을 맞지 않은 30대 미국인 남성의 말입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미국에서도 맹렬한 기세로 퍼지고 있습니다. 8월 들어 하루 신규 확진자가 10만 명을 훌쩍 넘었으며, 백신 접종률이 낮은 주들의 상황은 특히 심각합니다. 그런데도 백신이 남아도는 미국에서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 9천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에선 백신을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다는 뉴스를 접하면, 백신을 안 맞고 버티는 9천만 명이나 되는 미국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저도 무의식중에 ‘백신이 이렇게 남아도는데 아직도 안 맞은 사람이라면 아마 십중팔구 아주 기초적인 과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심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다른 매체들은 어떤 글을 올렸나 둘러보다가 고해상도에서 무료로 공개한 글 “스스로를 의심하라”를 읽었습니다. 뉴스페퍼민트도 그동안 확증편향을 비롯해 사람의 인지 편향에 관한 글들을 여러 차례 소개해 왔습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의 뉴스페퍼민트 소개 글에서도 우리는 필진에게 필터 버블의 함정에 빠지는 걸 피하고자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주장을 의식적으로 소개할 것을 권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무료로 올려 둔 또 다른 제 글을 보면 저부터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표를 많이 받은 주의 백신 접종률이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주에 사는 사람들을, 또는 백신을 안 맞고 있는 사람들을 예단하거나 싸잡아 비판하는 태도는 이들을 설득해 백신 접종률을 높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심하고 균형을 잡아보고자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습니다. 백신 안 맞는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묶어 비난할 수 있을까요? 백신을 안 맞거나 접종을 늦추고 있는 사람들이 드는 이유도 저마다 각양각색이지 않을까요? 여기에 답이 될 만한 기사를 뉴욕타임스가 썼습니다. 기사 제목에 답이 있었습니다.
“백신 안 맞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 뉴욕타임스 기사 제목
데일리 팟캐스트도 이 기사를 풀어 소개했습니다.
‘백신 안 맞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봅니다.
가장 먼저 ‘아직 안 맞은 사람’과 ‘절대 안 맞을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여러 설문조사 자료와 각종 데이터를 종합해보면, 미국인의 10% 정도는 ‘아직 안 맞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귀와 마음을 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든지 설득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안전성이나 효과가 더 확실하게 입증되면 자기도 백신을 맞고, 가족에게도 백신을 맞으라고 권할 거라고 말합니다. 백신 접종률을 높여 집단 면역을 달성하려면 이들에게 가장 먼저 공을 들여야 합니다. 글머리에 인터뷰를 소개한 미국인이 여기에 포함될 텐데 이 사람의 인터뷰를 조금 더 옮겼습니다.
“백신에 관한 온갖 음모론들 있잖아요. 저는 그거 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빌 게이츠가 백신에 칩을 넣어서 사람들을 감시할 거다? 민주당 정부가 백신을 이용해 인구를 조절하려 한다? 다 터무니없는 헛소리죠. 그래서 제가 백신을 안 맞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저는 뭐든 얼리어댑터가 아니란 말입니다. 엑스박스도 친구들이 다 재밌다는데 한참을 안 사다가 거의 끝물에 샀단 말이에요. 원래 그렇게 신중한 성격인 걸 어떡합니까?”
‘아직 안 맞은 사람’들은 대부분 백신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있어도 미미합니다. 어렸을 때 맞아야 했던 백신을 자기도 맞았고, 자녀에게도 다 맞춘 사람이 많죠. 계절 독감 백신도 매년 꼬박꼬박 맞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전성이 검증됐다고 믿는 백신에는 거부감이 덜한데, 아직 코로나19 백신은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코로나19 백신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정식 승인을 받으면 이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백신을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코로나19 백신은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지는 상황에 최대한 빨리 대처할 수 있도록 “긴급 사용 승인”만 받은 상태입니다. 다만 정식 승인을 받으려면 백신 개발 관련 연구 보고서부터 생산 시설까지 수많은 항목을 검사하고 검증해야 하므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코로나19 백신의 정식 승인은 빨라야 올해 말에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안 맞은 사람’ 중에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면 (내키지는 않더라도) 백신을 맞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어 살펴볼 ‘절대 안 맞을 사람’들 중에는 정부나 고용주가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면 미국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니 일을 그만두고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와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겁니다.
카이저 가족재단이 분석한 결과를 보면,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연령대로 나눠 보면, 49세 이하 젊은 사람이 70%가 넘었습니다. 이는 코로나19에 걸리더라도 치명률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종 분포를 보면 백인이 57%로 가장 많았고, 지지 정당도 공화당이 51%로 23%에 그친 민주당 지지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나머지는 지지 정당 없음) 최종 학력을 놓고 봤을 때 대학교 학사 이상 졸업장이 있는 사람들은 백신 안 맞은 사람 중에 17%에 불과했습니다. 또 도시보다는 근교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득을 기준으로 봤을 때도 연 소득이 4만 달러가 되지 않는 저소득층에서 백신을 안 맞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직 안 맞은 사람’과 ‘절대 안 맞을 사람’ 사이에서 뚜렷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인종, 학력, 소득 수준 등 여러 기준이 다 혼재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을 들여 설득해야 할 ‘아직 안 맞은 사람’과 달리 ‘절대 안 맞을 사람’들에겐 사실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이들 중에는 정말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과학을 부정하는 그릇된 종교적인 신념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익히 들었을 황당무계한 이유를 굳이 반복해서 열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들이 백신을 안 맞는 이유 가운데 음모론은 제외하고,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이유들을 추려 봤습니다.
먼저 전에 다른 백신을 맞았는데 맞고 나서 너무 아팠다거나 부작용을 경험해서, 또는 그런 사례를 보거나 들어서 백신을 안 맞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은 물론이고, 독감 백신이나 어렸을 때 접종해야 하는 백신들도 안 맞은 사람들이 미국에는 꽤 많은데, 그렇게 오랫동안 백신에 대한 불안, 두려움, 불신이 쌓인 끝에 “나는 건강하니까 백신 없어도 괜찮다, 괜히 건강한 내 몸에 균을 주입하는 건 싫다.”는 태도를 고수하게 된 겁니다.
정부를 못 믿겠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중에는 지금 여당이 민주당이고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라 못 믿겠다는 트럼프 지지자들도 있고, 민주당 지지자 중에도 뭐든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할 일을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미국답지 않다’고 굳게 믿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끔은 너무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지칠 때도 있는데, 반대로 미국 사람들을 보면 주변의 눈치를 좀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관해 세워둔 기준도 한국과 미국이 사뭇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선 “방역 수칙을 위반하고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모임을 했다”는 뉴스가 나면,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코로나19와 싸우는 모두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죄인이나 현행범 취급을 받습니다. 미국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개인이 결정할 일인데 그걸 강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정말 많습니다.
미국 정부가 연방정부나 연방 기관 소속 공무원들의 백신 접종을 의무화한 데 이어 주 정부, 시 정부, 기업들도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자 공무원 노조를 비롯해 수많은 단체가 백신을 맞으라고 강제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며 반기를 든 것도 한국인의 정서로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많지는 않겠지만, 백신을 ‘맞고 싶어도 못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이 3천만 명에 육박하는 미국에서는 병원의 문턱이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높습니다. 백신을 맞았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치료를 받을 수 없다 보니 그 점이 두려워 백신을 못 맞는 사람도 있고, 주치의가 백신이 안전하다고 말해주면 그때 백신을 맞을 생각인데, 주치의를 1년에 한 번 정도 볼까 말까 한 사람들이 많아서 아직 백신을 안 맞은 사람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합법적인 이민 비자나 취업 비자 없이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이민자 중에는 백신을 맞으면 어떻게든 자신의 기록이 남을까 두려워 백신을 안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집단 면역을 달성하기 위해) 신분을 조회하지 않고 백신을 접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일선에서는 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이 없으면 백신을 맞을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코로나19를 종식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은 모두가 다 백신을 맞는 길밖에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주에서 백신 접종률이 낮은 건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를 비판하고 백신을 안 맞은 이들에게 낙인을 찍기 전에 백신의 필요성을 듣고 이해해줄 사람들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정치적 양극화 탓에 좀처럼 오르지 않는 백신 접종률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려면 ‘아직 안 맞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디테일한 전략과 정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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