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GOAT 시몬 바일스와 정신건강

2020 도쿄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 초에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올렸던 글입니다. 지난 하계 올림픽은 모두 알다시피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예정보다 한 해 미뤄져 2021년에 열렸죠. 그래서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모레부터 베이징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인물은 역대 최고(GOAT, Greatest Of All Time) 기계체조 선수라 불리는 미국 대표팀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였습니다. 그가 모든 이가 기대한 대로 믿을 수 없는 연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싹쓸이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대신 엄청난 중압감 때문에 더는 자신의 정신 건강을 해칠 수 없다며, 대회 도중 기권한 바일스를 둘러싸고 많은 기사와 칼럼이 쏟아졌습니다. 제가 접한 미국 언론만 보면, 대체로 바일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의견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8월 3일에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올렸던 글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지상파 채널에서 온종일 올림픽을 중계하지만, 미국에선 NBC에서만 올림픽을 볼 수 있습니다. NBC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우리돈 약 9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도쿄올림픽부터 2032년까지 총 여섯 차례의 올림픽을 미국에서 독점 중계할 수 있는 권리를 샀습니다.

‘투자한 돈을 뽑으려면’ 대회가 열리는 동안 시청률이 높게 나와야 하겠죠. 그런 NBC가 올림픽 홍보를 위해 가장 앞세운 종목은 단연 여자 기계체조였습니다. 정확히는 체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는 시몬 바일스를 앞세웠다고 해야 할 겁니다. 바일스는 지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차원이 다른 경기력으로 여자 기계체조에 걸린 6개 금메달 중 4개를 휩쓸었습니다. 이번에도 몇 관왕을 차지하느냐가 관심사였을 뿐 실력에서 바일스와 겨룰 만한 선수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만 이겨내면 또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던 바일스가 지난주 기계체조 개인 예선을 겸한 팀 종합 경기 도중 기권했습니다. 이어 개인종합, 도마 등 개인 종목에도 출전을 포기했던 바일스는 (글을 쓰고 있는 2일) 마지막 개인 종목 경기인 평균대에 출전한다고 밝혔습니다. (바일스는 개인 종목 평균대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바일스의 결정을 둘러싸고 미국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역대 최고 선수로 평가받는 바일스가 포기를 결정한 건 대단한 용기라며, 이번 일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의견과 바일스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가 쇄도했습니다. 반대로 최고의 선수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권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고, 도를 넘은 비난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오늘은 역대 최고를 뜻하는 GOAT 시몬 바일스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시몬 바일스는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몬의 어머니는 시몬을 포함해 4명의 자식을 둔 싱글맘이었는데, 약물 중독 환자였습니다. 사실상 방치된 채 끼니도 거르기 일쑤였던 힘겨운 나날은 외조부모가 시몬과 형제, 자매들을 입양한 뒤로 나아졌습니다. 텍사스주 휴스턴 근교에 살게 된 어린 시몬은 다닐 어린이집을 찾던 중 체조 수업을 병행한 체육관 어린이집에서 코치의 눈에 띄어 체조에 입문하게 됩니다.

“Air Awareness”란 말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공기를 파악하는 능력” 정도가 될 텐데, 체조에서 공중에 몸이 떠 있을 때 내 몸의 위치를 포함한 상황을 읽어내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난생처음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몸을 비틀며 공중제비를 너무 쉽게 해내는 아이는 코치도 처음 봤다고 합니다.

공기를 파악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바일스는 기술을 연마하며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16살의 나이에 전미 체조 선수권대회를 제패하며 충격적인 데뷔를 한 바일스의 적수는 세계 무대에도 없었습니다. 차원이 다른 연기를 펼치며 세계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휩씁니다. 이어 19살의 나이에 처음 출전한 리우 올림픽에서 바일스는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됩니다. 자신의 주 종목인 도마에선 1차 15.900, 2차 16.033점을 받으며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NBC의 캐스터는 이렇게 말했죠.

이제 이 선수는 역대 최고 선수 중 한 명이라고 불러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이 선수가 역대 최고입니다.

 

리우 올림픽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체조는 물론 전 세계 스포츠계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터집니다. 미국 여자체조 대표팀 주치의로 일한 래리 내서(Larry Nassar) 박사가 150여 명에 이르는 여자 선수를 상대로 치료를 빙자해 성추행 등 성적 학대를 가한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내서는 2018년 법원에서 무기징역과 다름없는 17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시몬 바일스도 내서의 성추행 피해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래리 내서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바일스를 비롯해 여자 선수들이 범죄자에게 노출되는 상황을 막지 못한 미국 체조협회, 미국 올림픽위원회도 모두 공범이었습니다. 시몬 바일스는 특히 체조협회에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을 그저 메달 따 오는 기계로 여기고, 자신을 포함한 선수들이 받은 상처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고 사과하지 않는 상황에 좌절한 겁니다.

선수들은 협회와 우수한 성적을 내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협회는 선수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조차 똑바로 하지 못했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듭니다. – 시몬 바일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게 됐지만, 선수들의 상처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몬 바일스도 전에는 안 자던 낮잠을 꼭 자야 했고, 무기력한 순간이 잦아졌으며, 우울증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트라우마를 이겨낸 시몬 바일스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최고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상처를 금방 잊었습니다. 역대 최고 선수, 체조의 신이라면 어떤 역경도 이겨내야 한다는 걸 당연하듯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몬 바일스는 지난해 4월 NBC 아침방송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체조 선수로 복귀해 두 번째 올림픽에 출전하기로 한 이유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더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는 게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제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성범죄 피해의) 생존자가 보이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수많은 선수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힌 범인과 그 범인을 걸러내지 못한 체조협회에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만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결점 없는 최고의 선수’ 시몬 바일스도 성범죄 피해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6월 열린 올림픽 선발전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됐죠. 평균대 연기 도중 균형을 잃고 평균대에서 떨어진 겁니다. 다른 종목에서 워낙 바일스답게 뛰어난 연기를 펼친 덕분에 무난히 미국 대표팀에는 뽑혔지만, 공기를 파악하는 능력을 타고난 바일스 본인에게도 무척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던 듯합니다.

한 차례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Twisties”가 의심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꽈배기”로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단어는 체조나 다이빙 등 공중에서 몸으로 연기를 펼치는 종목 선수들에게는 특히 위험한 현상입니다. 체조나 다이빙에선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동작을 무수한 반복을 통해 몸에 익히고, 경기에선 연습하며 익힌 몸의 기억에 의존해 연기를 펼칩니다. 그런데 연기 중에 몸의 기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겁니다. 도쿄올림픽 체조 예선 도마 종목에서 바일스는 몸을 비틀어 두 바퀴 반을 도는 고난도 연기를 펼치겠다고 해놓고 한 바퀴 남짓밖에 돌지 못한 채 아주 불안정하게 착지하고 맙니다. Twisties 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도마 경기 직후 팀원들에게 더 뛰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는 바일스(오른쪽)의 모습. 사진=NBC 중계화면 갈무리.

체조 등 여러 스포츠 종목을 20여 년째 취재해 온 뉴욕타임스의 줄리 마커 기자는 뉴욕타임스 데일리 팟캐스트에서 Twisties 현상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퇴근길 고속도로에서 1차선으로 가다가 빠져나가야 할 나들목을 앞두고 차선을 가장자리로 바꿔야 하는데, 그때 갑자기 자동차를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듯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과 같아요.

 

비슷한 현상으로 입스(yips)가 있습니다. 골프에서 퍼트할 때 너무 긴장해서 손이 떨리거나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골프에선 이런 문제가 일어나도 타수가 늘어나면 그만입니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몇 바퀴 반을 돌 때는 동작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 착지를 잘못하기라도 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체조 선수 경험이 있는 사람들, “꽈배기”의 무서움을 잘 아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바일스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일스는 이후 개인종합 경기와 도마, 이단 평행봉 등 개인 종목에서 모두 기권했습니다. 바일스가 빠진 미국은 팀 종합에서 러시아올림픽위원회에 금메달을 내줬습니다. 미국 체조협회를 비롯해 미셸 오바마, 저스틴 비버 등 많은 사람이 바일스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선 가운데, 일각에선 팀에게 피해를 끼친 기권자일 뿐인 바일스를 옹호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바일스가 자란 텍사스주의 애런 레이츠 법무부 차관은 바일스의 기권이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겼다”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발목 부상을 딛고 끝까지 연기를 펼친 케리 스트럭 선수의 강인한 모습이 그립다고 바일스를 에둘러 비판했습니다. 당시 스트럭 선수는 왼쪽 발목을 다친 상황에서도 마지막 도마 연기를 펼쳤고, 공중에서 착지할 땐 다친 왼발을 살짝 든 채 오른발에 거의 모든 무게를 실어 착지했습니다. 선수 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일상생활도 지장을 받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연기를 펼친 스트럭의 표정은 고통으로 이내 일그러졌죠.

바일스를 향한 비판은 주로 보수 언론에서 나오는데, 주로 나이 든 백인 남성들인 보수 논객들은 바일스의 기권을 나약함의 증거로 볼 뿐 아니라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근거로 삼습니다. 유색인종 여성 스포츠 선수에 대한 편견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표출된 거죠. 그러나 미국의 흑인 스포츠선수들은 오랫동안 공정하지 않은 처우를 받으면서도 올림픽에서 수많은 메달을 땄습니다. 텍사스주의 레이츠 법무부 차관이 강인함의 표상으로 예로 든 백인 여성 체조선수 케리 스트럭도 트위터를 통해 시몬 바일스에게 사랑과 응원을 보낸다며 바일스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죠. (레이츠 차관은 나중에 트위터를 통해 바일스에게 사과했습니다.)

케리 스트럭은 시몬 바일스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진=스트럭 트위터 갈무리

아픈 걸 꾹 참고 끝까지 경기를 치르는 모습은 우리 언론에서도 ‘투혼’으로 포장되고, 찬사를 받곤 합니다. 반대로 도중에 포기하는 모습은 특히 정신력이 강인하지 않다는 증거로 여겨지곤 하죠. 특히 몸의 어디에 멍이 들거나 발목이 꺾이고 팔이 부러지는 몸의 부상은 눈에 보이지만, 정신건강이 다치는 건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더 그렇게 비치기도 합니다.

바일스의 기권 결정은 정신건강도 몸을 다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분명히 알린 계기로 기억될 겁니다. 역대 최고의 체조 선수가 내린 결정인 만큼 그 파급력도 더 클 수밖에 없었죠. 올림픽에서만 총 28개의 메달을 딴 전설적인 수영선수이자 본인이 우울증, 중독 등 정신건강 문제를 겪은 뒤 이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마이클 펠프스는 NBC에 출연해 시몬 바일스의 결정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시몬 바일스 선수가 겪고 있는 상황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큰 위로를 전하고요, 동시에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알린 바일스 선수의 대단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스포츠선수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만연한 문제인지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는 베이징 동계올림픽 이야기를 썼습니다. 월 구독료 4,500원인데, 지금 구독하시면 첫 달은 무료로 저희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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