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9월, 세계 1차대전의 총성이 서서히 멎어가던 그때 전에 없던 독감 바이러스가 영국령 제도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참전 중인 군인과 민간인을 가릴 것 없이 병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도 독감을 앓았습니다.
9월 11일, 연합군의 잇따른 승전보에 한창 고무돼 있던 로이드 조지 총리는 맨체스터를 방문했습니다. 탄약을 비롯한 군수품 제조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휴가 중인 군인들까지 총리를 환영하러 나온 인파가 피카딜리 기차역부터 앨버트 광장까지 가도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로이드 조지 총리는 갑자기 목이 따갑고 열이 나더니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로이드 조지 총리는 이후 열흘 동안 맨체스터 시청 한편에 마련된 병상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로 지냈습니다.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호흡 보조장치 없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죠. <맨체스터 가디언>을 비롯한 신문들은 총리의 병세를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다뤘습니다. 전쟁 중인 독일군이 이를 알고 대대적으로 선전 공세에 나설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이드 조지 총리 옆에서 병 수발을 든 이들의 말에 따르면 총리는 거의 사경을 헤맸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55살이었던 로이드 조지 총리는 독감에서 낫고 간신히 살아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건 아닙니다. 아직 항생제와 백신이 개발되기 전의 시대였습니다.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 대부분 언론을 엄격히 통제하고 검열하던 전시 상황에서 언론 검열 없이 상황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던 중립국 스페인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영국에서만 25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끔찍한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이 대부분 20~40대 젊은 남성이었다면, 독감은 노약자나 어린이들부터 공략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가장 최근 집계에 따르면 1918년 봄부터 1919년 겨울 사이 세 차례 창궐한 전염병에 전 세계적으로 적게는 5천만 명, 많게는 1억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100년 사이 세계 전체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지금으로 따지면 2억 명에서 많게는 4억 2,500만 명이 독감으로 죽은 셈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 어디서 조류독감이 발견되면 곧바로 세계보건기구 상황실(war room)로 보고되고 바로 체계적인 방역과 격리 조치가 시작되지만, 100년 전에는 조기 경보 체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페인의 국왕 알폰소 3세가 마드리드에서 독감에 걸렸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이 농담이라고 생각하거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걸 보면 사람들은 독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소금물로 입안을 헹구고 열이 내릴 때까지 스스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고 쉬라는 정도가 대책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마저도 빨리 전장에 군수품을 보내야 했던 공장 노동자들은 예외였습니다. 아파도 쉬지 못하고 일한 결과 독감 바이러스는 빠르게 퍼졌습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HIV/Aids)을 비롯한 다른 유행병,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피해도 유럽이나 북미 사람들보다 아프리카, 아시아인들이 더 컸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스페인 독감에 걸린 환자의 치사율이 대략 2% 정도였지만, 무려 1,850만 명이 숨진 인도에서는 치사율이 6%나 됐고, 이집트에서는 치사율이 10%에 육박해 13만 8천 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감 바이러스에 면역이 전혀 없는 고립된 도서 지역에서는 피해가 막심했는데, 예를 들어 서사모아에서는 인구의 1/4이 몰살됐습니다. 아메리칸 사모아에서는 사망자가 한 명도 없던 것과 대조되는 결과입니다.
왜 이렇게 유달리 급속도로 독감이 퍼졌고, 사망에 이르는 독특한 역학적 패턴은 오늘날까지도 과학자들이 그 수수께끼를 다 풀지 못한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독감에 붙은 이름과 달리 바이러스가 처음 스페인에서 발견돼 퍼지기 시작했다고 믿는 역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많은 역학자가 독감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인 1918년 여름 코펜하겐과 다른 북유럽 도시 몇 군데에서 감기가 돌았던 점을 지적합니다.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직접 사람에게 옮은 건지, 아니면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다른 가축 등 포유류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에게 옮은 건지 그 경로를 밝히는 일은 훨씬 더 복잡해 지금껏 누구도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캔자스를 바이러스의 진원으로 지목하는 과학자들도 있고, 북부 프랑스나 중국을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올해 초 1918년 지구를 휩쓴 공포의 스페인 독감에 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미국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의 분자 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거(Jeffrey Taubenberger)를 새로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인터뷰했습니다. 토벤버거 박사는 벌써 30년 넘게 스페인 독감을 연구해 온 이 분야의 석학으로, 약 20년 전에는 1918년 미군 병영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숨진 군인의 몸에서 병리 목적으로 떼어낸 견본 조직과 당시 알래스카 해변에 묻힌 이누이트 여성의 폐 조직에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RNA 조각을 찾아 복구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누이트 여성의 시신은 알래스카의 동토층에 묻힌 덕분에 부패하지 않고 보존됐습니다.
현대 과학의 분자 기술을 활용해 토벤버거 박사와 앤 리드(Anne Reid) 박사는 바이러스의 RNA 조각을 확대, 분석한 뒤 2005년 바이러스의 유전자 구조를 펴냈습니다. 그들이 찾아낸 결과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역학자들은 (사람 사이에서) 독감이 유행하기 전이나 후에 개, 고양이, 말 등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가축이나 동물들에서도 유행성 독감이 같이 돈다고 믿어왔습니다. 또 그렇게 돈 독감 바이러스에 돼지나 사람이 감염되면 독감이 유행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야생에도 감기 바이러스가 있지만 그건 철새들 사이에서만 도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토벤버거 박사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 구조를 분석해봤더니 대부분 새에게서 발견되는 독감 유전자와 거의 똑같았던 겁니다. 토벤버거는 H1N1이라고 이름 붙인 독감 바이러스가 새들 사이에서 도는 바이러스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도 1916~1918년 어느 시점에 새들에게서 직접 사람으로 전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토벤버거의 발견은 곧 앞으로도 조류독감이 인수 공통 전염 바이러스로 변종되면 언제든지 유행성 독감이나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동남아시아를 강타했던 H5N1 조류독감이나 중국에서 사람에게 옮아 두려움에 떨게 했던 H7N9 조류독감도 자칫 큰 전염병으로 커질 수도 있었습니다. 토벤버거의 연구에 왜 박물관에 있어야 할 옛날 역병의 망령을 불러냈느냐고 묻거나 독감 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잘못 관리돼 바깥 사회에 퍼져 다시 유행병을 일으키거나 혹여나 바이러스가 테러 단체의 손에 들어가면 어떡하냐고 우려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토벤버거와 동료 과학자들은 냉동 보관된 바이러스를 연구한 전후에 매번 FBI의 검사를 받았고, 서아프리카에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 의료진이 입는 것 같은 전신 작업복과 두 겹의 장갑, 호흡기까지 달고 연구실을 출입해야 했습니다. 또 매번 홍채 인식을 거쳐야만 연구실을 드나들 수 있었죠. 토벤버거 박사는 “마치 일급 국가기밀을 다루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백신을 개발하거나 치료법을 찾아내려면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스페인 독감은 현대 독감 바이러스보다 무려 3만9천 배나 많은 바이러스 입자를 만들어내며 치명적인 위력을 드러냈습니다. 토벤버거 박사는 염증 반응을 확인했고, 이를 근거로 쥐를 독감 바이러스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자들이 감기 바이러스를 물리칠 방법을 찾아내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도 멉니다. 유행성 독감이나 전염병은 말할 것도 없고, 계절 독감에 듣는 일반적인 백신을 개발하는 것도 아직 요원합니다.
(가디언, Mark Honigsb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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