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세계정치

새로운 걸프전 – 예멘은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비참한 곳이 되었을까요?(2/3)

그 어디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걸프전 – 예멘은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비참한 곳이 되었을까요?(1/3)

그 어디도 폭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습니다. 약 40여 개의 의료시설이 지난 6개월간 폭격 때문에 피해를 보았습니다. 앰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는 예멘 정부를 지지하는 중동 연합이 의도적으로 민간인, 병원, 학교, 시장, 모스크 등을 공격하고 대부분 국가에서 금지한 광범위 폭탄과 같은 목표를 정확히 공격할 수 없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연합은 심지어 약 5만 명이 사는 사나 시 전체가 군사적 목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알리 마헤드(Ali Marhad)는 10년 전 사나를 떠났습니다. 그는 결국 마즈라크 피난민 캠프에 들어갔습니다. 이 캠프는 중동 연합에 의해 2015년 폭격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40명이 죽었습니다. 40명 중 마헤드의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하자(Hajjah)에 있는 캠프로 이동했습니다. 올해 초 이곳에도 폭탄이 떨어져 나뭇가지와 방수포로 되어있는 그의 조촐한 집마저 무너졌습니다. 예멘에서 전쟁을 피해 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만 명은 이 전쟁에서 총알과 폭탄에 의해 숨졌고, 이 중 대부분은 민간인입니다. 시리아 전쟁 때는 이에 40배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시리아 전쟁 때 발생한 난민은 주로 유럽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아마도 예멘 내전이 그때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유럽이 이 전쟁에 의한 난민 문제를 직접 겪지 않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국 시민의 반 이상은 이 내전을 전혀 모릅니다. 사상자에 대한 통계 역시 부정확합니다. 수많은 예멘 시민이 직접 무기에 의해 죽기보다는 전쟁으로 발생한 기근, 의약품의 부족으로 숨졌습니다. 내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전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멘에서 전쟁은 흔한 일입니다.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예멘은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외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세기만 봐도 이 지역에서는 여러 나라에 의해 약 십여 번 이상의 무력 충돌이 있었습니다.

현재 내전은 부분적으로는 1960년대의 분쟁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1960년대에 예멘에서는 북쪽 지역과 영국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남쪽 지역 간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예멘에 독립된 두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북쪽 지역의 지도자들은 국가운영 기조로 제정일치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방법으로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아냈습니다. 남쪽은 종교색을 버리고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습니다. 남쪽 지역은 결국 소련의 편에 섰습니다. 정치적 불화는 1972년과 1979년에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졌지만, 경제 불황과 냉전 시대 종결 이후 이 두 지역은 다시 통합되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여러 번의 합의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남북지역은 국외 자본을 유치하고 원유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헌법에 합의했습니다.

짧은 기간 자금은 들어오고 원유가 수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던 예멘은 결국 1994년 내전을 겪었고, 이때 살레가 이끄는 북쪽 지역이 승리했습니다. 이후 살레가 이끄는 국민의회당(GPC)은 의회를 장악하면서 권력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에 있었던 총선은 연기되고 이 상황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잡혀갔습니다. 살레와 그의 부하들은 수조 원에 이르는 국부를 횡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예멘 시민들은 평균 하루 3불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아의 한 분파인 자이디(Zaydis)는 예멘 인구의 40% 이상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자이디 시아는 살레의 통치하에서 특히 더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후티는 이 자이디 시아에서 유래한 집단입니다. 1990년 후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극단주의에 영향을 받아 예멘 정부가 미국과 함께 반테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살레는 후티의 주장에 대해 정부를 붕괴시키려고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부군과 후티 반군의 싸움으로 2004년부터 2010년 사이에만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당시 후티 반군의 지도자 바드레인 알후티(Badruddin al-Houthi)도 전사했습니다. 후티라는 명칭은 처음부터 알후티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살레의 통치에 반대하던 세력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그 기세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수만 명의 예멘인이 거리로 나와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걸프 국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살레는 2012년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그 당시 부통령이던 하디(Hadi)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짧은 희망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유엔의 감독하에 2014년 연방 시스템과 남북에 각각 독립된 의회를 세우는 내용을 골조로 하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초안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티는 계속 정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2012년 하디가 승리한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2014년 합의사항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의회, 정부에서 원하는 보직도 얻지 못했습니다. 후티는 좌절했습니다. 이때,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싫어하던 살레와 후티 반군이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살레는 정권이 교체되지 않거나, 적어도 자기 아들이 정권을 물려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디에 대한 불만이 있고, 이집트 이슬람 세력과 연결되어 있던 이슬라(Islah)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던 살레와 후티 반군은 결국 2014년 손을 잡게 됩니다. 그해 9월 이 두 세력의 연합군은 수도 사나에 진입했습니다. 사나 시민들은 하디가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연합군을 반겼습니다. 후티와 정부가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안이 UN의 중재 하에 만들어졌지만 결국 아무도 그 중재안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2015년 초 반군은 사나를 완전히 탈환했습니다. 3월에는 아덴까지 진출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원문 보기

CFR

Recent Posts

[뉴페@스프] “응원하는 야구팀보다 강한” 지지정당 대물림… 근데 ‘대전환’ 올 수 있다고?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1 일 ago

[뉴페@스프] ‘이건 내 목소리?’ 나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이 속였는데… 역설적으로 따라온 부작용

* 비상 계엄령 선포와 내란에 이은 탄핵 정국으로 인해 한동안 쉬었던 스브스프리미엄에 쓴 해설 시차발행을…

4 일 ago

살해범 옹호가 “정의 구현”? ‘피 묻은 돈’을 진정 해결하려면…

우리나라 뉴스가 반헌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해 내란죄 피의자가 된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는 뉴스로 도배되는 사이 미국에서…

5 일 ago

미국도 네 번뿐이었는데 우리는? 잦은 탄핵이 좋은 건 아니지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 투표가 오늘 진행됩니다. 첫 번째 투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단으로 투표에…

1 주 ago

“부정 선거” 우기던 트럼프가 계엄령이라는 카드는 내쳤던 이유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해제 이후 미국 언론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태에 큰 관심을 보이고…

2 주 ago

트럼프, 대놓고 겨냥하는데… “오히려 기회, 중국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중”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에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안보…

3 주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