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배마주 버밍엄 – 공화당의 아성이라고 불러도 전혀 지나치지 않은 앨라배마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검사 출신 민주당 더그 존스(Doug Jones) 후보가 실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공화당의 로이 무어(Roy S. Moore) 후보를 둘러싼 여성 성추행 전력과 아동학대 전력으로 구설이 끊이지 않은 끝에 공화당은 떼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는 앨라배마주 상원 의석을 잃게 됐습니다.
민주당으로서는 솔직히 꿈도 꾸지 않았을 기적적인 역전승 덕분에 공화당의 상원 의석 한 자리만 다음 선거에서 빼앗아오면 의석수를 맞출 수 있게 됐습니다.
존스 후보의 승리는 미국 정치 지형에도 작지 않은 파문을 몰고 올 것으로 보입니다. 상하 양원을 장악한 공화당이지만 주요 입법을 처리하는 데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됐고, 민주당으로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내년 중간선거에서 잘하면 상원 다수당 지위를 되찾아올 수 있는 희망을 확인했습니다. 공화당 지도부마저 등 돌린 로이 무어 후보를 막판에 전폭 지원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상당히 쓰라린 패배가 아닐 수 없게 됐습니다.
시내 한 호텔에서 수많은 지지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개표를 지켜보던 존스 후보는 자신의 승리가 “정쟁에 질린 유권자들의 워싱턴을 향한 단호한 메시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특히 “앨라배마는 이번만큼은 정치적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라며, 선거 과정을 통해서도 자신은 늘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를 던지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습니다.
“온 미국을 향해 오늘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존엄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선거였습니다. 선거운동도 무엇보다 법치의 가치를 떠받드는 데 신경 썼죠.”
트럼프 대통령은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둔 존스 후보에게 트위터를 통해 축하 인사를 전했습니다.
선거는 분명 철저히 무어 후보에게 불리하게 흘러갔습니다. 극단적인 보수 성향 판사로 법원에서부터 논란을 불러일으킨 판결을 여러 차례 내렸던 무어는 미성년자 소녀들을 강제로 추행한 혐의를 받으며 선거를 치렀습니다. 현재 앨라배마주 인구 구성이나 뿌리 깊은 보수 성향 정치 문화를 감안하면 민주당에 승산은 거의 없는 선거였습니다. 하지만 존스는 이를 극복했습니다. 존스 측은 무엇보다 흑인 유권자의 투표율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이들의 투표를 독려하는 데 주력했고, 교육 수준이 높은 백인 유권자들에게도 현재 공화당의 난맥상을 부각하며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지난 12일 선거 결과 이 전략은 주효했던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앨라배마 최대 도시인 버밍엄과 버밍엄 일대 선거구에서 존스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헌츠빌을 비롯해 다른 도시에서도 많은 표를 받았습니다. 부유한 백인 유권자들 가운데 무어 지지층에서 이탈하는 표가 꽤 나온 반면 흑인 유권자들은 존스 지지로 똘똘 뭉쳤습니다. 결국, 존스는 앨라배마의 견고한 인종 구성을 뚫고 선거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지지세력을 규합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공화당 성향으로 분류될 만한 유권자들 가운데 무어도 싫고 민주당도 싫은 사람들이 제3의 후보 이름을 직접 적어 투표한 것도 결과적으로 존스의 승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양대 후보가 아닌 제3의 인물 이름을 직접 쓴 표는 총 2만 표가 넘었습니다.
앨라배마는 남부 지역 가운데서도 특히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곳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입니다. 주 정부의 정권 교체는 꿈도 꿀 수 없던 진보 성향 유권자들에게 존스 후보의 이번 승리는 분열을 조장하는 보수 일색의 앨라배마 정치 지형을 뒤흔들 수 있는 값진 성과입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장을 지냈던 수벨콥은 존스의 당선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맹목적인 정당 지지가 만연한 앨라배마의 상황을 정면돌파한 점을 높이 샀습니다. 공화당원들에게도 정성을 다해 자신을 알렸고, 민주당원들의 투표를 독려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콥 전 대법원장은 내년 선거에서 앨라배마 주지사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앨라배마에서) 이번 선거만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어요. 정말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죠.”
이내 민주당원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고, 콥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무대 위 화면에는 존스 후보가 당선이 유력하다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버밍엄시의 랜달 우드핀 시장은 버밍엄시가 존스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을 밝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서 있었습니다. 마이크를 잡았을 때도 그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기분 좋습니다. 우리는 미국 전체를 넘어 전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보낸 거예요.”
제프 세션스 전 의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며 공석이 된 상원의원 자리를 채우기 위해 치른 이번 보궐선거 결과는 처음에는 너무 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특히 막판 들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접전 양상을 띠면서 이번 선거는 앨라배마의 정체성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가 되었고,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력이 함께 간접적인 시험대에 올랐으며, 미성년자인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후보도 기꺼이 감싸려 드는 강경 보수 유권자들의 선택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63세의 존스 후보는 1963년 버밍엄 16번가 침례교회에 폭탄 테러를 저지른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 단원 두 명을 기소했던 검사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주로 자신을 화해와 통합의 상징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당선되면 교육이나 의료, 보건 분야에서 민주당의 전통적인 노선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앨라배마의 또 다른 상원의원인 공화당의 리처드 셸비(Richard C. Shelby) 의원과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소통해 주의 이익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어는 선거기간 내내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를 다지는 데 거의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껏 내세운 공약이나 메시지라고 해봐야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다거나 상대방 존스 후보가 속한 민주당을 깎아내리는 아주 기초적인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1월 초 그가 14살 소녀를 강제로 성추행했고, 다른 미성년자들과도 성적인 관계를 하려 했다는 의혹이 보도된 뒤로는 그나마 선거유세 현장에서 후보 본인을 찾기가 어려워질 만큼 무어는 은신 아닌 은신에 들어갑니다.
선거 당일,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면서 앨라배마주 도시들을 중심으로 존스 후보가 선전을 펼친 것으로 나타나자, 주도 몽고메리에서 열린 무어 후보 측 선거운동본부의 분위기는 착잡하게 가라앉았습니다. 홀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는 색소폰 소리가 구슬프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뉴욕타임스>가 개표 결과를 속보로 전하며 존스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전하자, 자리에 모인 이들은 더욱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무어는 AP통신이 존스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속보를 전한 지 한 시간쯤 흐른 뒤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개표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풀이 죽은 지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하시고 우리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실지 기다리자. 일단 집에 가서 잠들 좀 주무시라.”고 말했습니다.
뜻밖의 패배는 워싱턴의 공화당 지도부에 특히 쓰라린 상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상원 의석수에서 민주당에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그 격차가 더욱 좁혀졌으니 이제는 어떤 정책이든 무언가를 추진할 때마다 셈법이 훨씬 더 복잡해졌습니다. 무어 후보는 앨라배마주 공화당 경선에서는 (공화당 지도부가 좋아할 만한 주류 공화당 후보를 꺾고) 돌풍을 일으키며 후보가 됐지만, 정작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국, 내년 중간선거에서 출마를 고려하던 주류 공화당 정치인들이 생각을 바꿔 선거에 도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고, 상원의원 한 명이 민주당 소속으로 바뀜에 따라 기존 인사들의 은퇴도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로서는 온갖 추문으로 몸살을 앓는 정치인을 같은 당 의원으로 상원에 들이는 데 대한 부담을 던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기도 합니다. 상원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널(켄터키) 의원을 비롯한 공화당 상원의원 여러 명은 이미 로이 무어가 당선되더라도 공화당 윤리위원회가 그를 둘러싼 추문을 조사할 것이고, 조사 결과에 따라 의원직을 박탈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공화당 일각에서는 몇 달이 걸릴지 모를 내홍을 전국적으로 생중계하게 될 것이 뻔한 일이라며 윤리위원회 회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반대했죠. 하지만 더그 존스의 깜짝 승리로 공화당은 무어 의원의 거취를 놓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씁쓸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앨라배마에서 상원 의석을 잃은 공화당은 실로 큰 타격을 입게 됐습니다. 이번 선거전까지만 해도 2018년 중간선거 이후에도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으로 남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상원은 2년마다 치러지는 선거에서 전체 의석의 1/3을 교체합니다. (상원의원 임기는 6년) 내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 되려면 25곳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한 주 10곳도 포함돼 있습니다. 반면 공화당 의원의 임기가 끝나 내년 선거를 치르는 곳 가운데 민주당이 탈환을 노려볼 만한 곳은 두세 곳(애리조나, 네바다, 테네시)에 불과합니다.
이제 존스 당선자가 취임하면 상원 공화당 의석은 51석으로 과반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이 됩니다. 민주당으로서는 뜻밖의 승리 덕분에 전세 역전을 노려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 선거가 전국적인 이목을 끈 계기는 뭐니 뭐니 해도 11월 초 터진 로이 무어의 성추행 스캔들이지만, 공화당은 앞서 그보다 몇 달 전 이미 경선 과정에서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애초에 이번 보궐선거가 치러진 이유가 트럼프 대통령이 세션스 의원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세션스 의원이 부패 전력과 여러 행적 탓에 과연 장관직에 어울리는 인물인지를 두고 당내에서도 이견이 많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고 앨라배마주 정부는 부랴부랴 보궐선거 일정을 짰습니다. 이번에는 공화당 내에서 후보를 누구로 할 것이냐를 두고 후원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습니다.
막대한 소수 후원자의 지지를 등에 업고 무어가 공화당 후보가 됐고, 당 지도부는 탐탁지 않은 무어를 초가을 무렵 억지로 지지하기로 합니다. 이때가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사들이 로이 무어의 성 추문을 한창 취재하고 있을 때였죠.
이어 11월 초, 워싱턴포스트가 먼저 특종을 터뜨립니다. 지방검사로 일하던 30대 시절, 무어가 10대 소녀 4명을 성적으로 강제로 추행했으며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은 당시 14살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어로부터 성추행이나 성희롱 등 괴롭힘을 당했다는 여성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한 명은 무어가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무어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해도 앨라배마주 선거이다 보니 여전히 무어에게 승산이 있어 보이자,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나섭니다. 추수감사절 주간을 활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무어를 지지하는 트윗을 쏟아내며 앨라배마 유권자들에게 존스를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고 트럼프식 유세에 나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원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던 무어 선거운동은 다시 진용을 추슬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주 금요일 선거를 앞두고 앨라배마주와 인접한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에서 무어 후보를 지원하는 연설을 한 뒤 존스 후보 측에서 실시한 내부 여론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던 존스 후보의 우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도, 여러 가지 정황도 존스 편이었던 선거임은 분명합니다. 존스는 한 달 반가량의 선거기간 동안 총 1,020만 달러를 모금해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투표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시시하게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뻔한 앨라배마주 상원 보궐선거가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 가운데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닌 제3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원래 공화당 성향의 유권자들이었기 때문에 존스에게 유리했습니다.
존스는 선거를 치르는 내내 앨라배마주와 관계가 없는 주 밖의 인사들은 거의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도움을 청한 지역의 유명인이 있다면 왕년의 농구 스타 찰스 바클리였습니다. 존스 후보 측은 주로 도시에 사는 흑인 유권자들, 대학생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데 철저히 집중했습니다.
무어는 성추문 의혹이 잇따라 보도되는 가운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선거 마지막 주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선거 전날인 월요일 앨라배마주 남동쪽 시골의 작은 마을을 찾은 무어의 곁을 지킨 건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수석 보좌관 스티브 배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무어는 이슈메이킹에도 실패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한 것도 무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배넌은 MSNBC 진행자인 조 스카보로의 학벌을 조롱했다가 문제가 됐습니다. 조 스카보로는 앨라배마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무어의 부인 카일라는 자신과 남편을 향해 반유대주의자들이 아닌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이를 반박하며 “우리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 유대인”이라는 조야한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로이 무어와 군 생활을 함께했던 이는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자신이 무어와 어쩌다 실수로 사창가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때 거기서 본 매춘부들 가운데 몇 명은 대단히 어려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묻기도 전에 그런 말을 괜히 꺼내 가뜩이나 곤욕을 치르던 무어 후보를 더 당혹게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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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메시지를 보내려면 판사 출신 아동성애자를 간신히 이긴 민주당보다 훨씬 제대로된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민주주의 후진국 입장에서 봐도 너무나 당연한 정의가 한참은 지연된 사례라고 생각하는데요...
여튼 트럼프 이후의 미국은 원래 미국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 엉클톰이 바지 내리고 얼굴 빨개져서 뛰어댕기는 모습이 연상된다고나 할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