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음담패설 영상이 공개된 일을 계기로 여러 공화당 거물들이 트럼프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아니, 왜 하필 이제와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 영상에서 드러난 트럼프의 본 모습이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것도 아닌데, 왜 일부 공화당원들은 이제와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돌아서는 것일까요? 물론 지푸라기 한 가닥을 더 얹었더니 낙타의 등이 부러졌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낙타가 여간 튼튼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람들이 그 원인으로 꼽는 것은 우선 “영상의 힘” 입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보도가 그저 기사였다면 역시 수많은 가십성 기사와 다를 바 없었겠지만, 트럼프의 말과 행동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의 영향력은 달랐다는 것이죠. 트럼프가 자백한 행동의 수위가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행동은 실제로 일부 주에서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이니까요. 타이밍이 문제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영상이 공개된 것은 1차 TV 토론이 끝난 직후였죠.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1차 토론의 승패는 명백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상이 공개되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관건은 정치, 그리고 공감입니다.
우선 정치적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영상 속 트럼프의 막말에 많은 여성들이 크게 분노했을 것입니다. 트럼프가 막말로 적을 만드는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표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까지 트럼프의 막말이 겨눈 집단은 어차피 트럼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집단, 공화당의 표밭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었죠. 트럼프는 애초부터 이들에게 어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흑인 교회를 방문하거나 소수집단과 만나는 행사 마저도 이들과 사이를 돈독히 하려는 목적이었다기보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면모에 거부감을 느끼는 백인 부동층을 안심시키기 위한 제스처였습니다. 트럼프에게 특히 중요한 집단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 백인 여성들입니다. 1990년대에는 “싸커맘”, 2001년 테러 이후에는 “시큐리티맘”이라고 불린 엄마들이죠. 이들의 지지는 빌 클린턴-앨 고어의 백악관 입성, 조지 부시와 오바마의 연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백인 이외의 집단에서 인기가 바닥인 트럼프에게는 이들의 지지가 더욱 절실한 상황입니다. 백인 표의 65%는 얻어야 당선된다는 계산도 있죠. 백인 남성의 경우 65%는 너끈히 확보했지만, 여성의 표심은 좀 다릅니다. 현재 젊은 여성은 클린턴 쪽으로, 나이든 세대 여성은 트럼프 쪽으로 기운 가운데 관건은 “엄마층”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전투는 트럼프의 전투일지 몰라도, 공화당원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투죠. 바로 이것이 지난 6개월 동안 트럼프에게서 등을 돌린 공화당 의원의 수보다 최근 48시간 사이에 마음을 바꾼 의원의 수가 많은 이유입니다. 그 중에는 개인적인 공격을 받고도 “중립”을 유지해 온 존 맥케인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도 있습니다. 그는 이번 지지 철회가 트럼프 지지자들의 반감을 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애리조나 주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히스패닉계 유권자들을 잃은 마당에 백인 여성표까지 잃을 수는 없다는 다급한 정치적 계산을 토대로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죠.
다음으로, 공감이라는 차원에서 공화당원들의 변심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정적, 개인적 접근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트럼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반이민 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불법 이민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 가족을 전면에 내세운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의 전술이 트럼프의 발목을 잡은 일도 많습니다. 무슬림 전사자 가족, 멕시코계 판사와의 갈등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을 샀고, 수많은 여성비하 전적에도 불구하고 메건 켈리, 알리시아 마차도라는 구체적인 인물에게 무례한 언행을 가했을 때 비판은 더욱 거세게 일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에 공개된 영상 속 트럼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살아 숨쉬는 여성들의 신체를 위협하고 건드렸다는 말을 자랑스레 하고 있으니까요. 트럼프 선거 캠프는 이 영상에 대해 “락커룸 대화”라며 허세였다는 식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 트럼프에게 영상 속 설명대로 추행을 당한 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마침내 “트럼프의 여성 비하”에 나오는 여성이 자신, 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럼프를 비난하는 성명들이 유난히 우리의 어머니, 딸, 자매를 들먹이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번 사태는 유명한 기차 경로 바꾸기 실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섯 사람이 서 있는 선로를 따라 기차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레버를 당겨 기차의 선로를 바꾸면, 기차는 한 사람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질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응답자들은 기꺼이 레버를 당겨 한 사람이 죽더라도 다섯 사람을 살리겠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 비틀면 사람들의 응답은 달라집니다. 레버를 당기는 대신, 한 사람을 기차 앞으로 밀어 버리면 기차를 세우고 다섯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한 사람을 죽여서 다섯 사람을 살린다는 결과는 같지만,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직접 밀어야 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이것이 훨씬 더 잘못된 행동이라고 느낍니다. 트럼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단순히 여성비하적인 인물이라는 것과, 그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여성을 추행했다는 것에 관해 사람들이 느끼는 간극은 무척 큽니다. 기차 실험을 연구한 하버드대 심리학과의 조슈아 그린 교수는 기차 앞으로 사람을 떠미는 행위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적극적이고, 직접적이며, 목표가 구체적인 나쁜 짓”이기 때문인데, 영상 속 트럼프의 언행은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린 교수는 이런 해석이 매우 단순한 팩트를 과하게 분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팩트란 바로 트럼프가 영상 속에서 자백한 행동이 왜 나쁜지 구체적으로 따질 것도 없이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죠. (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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