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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사설] 조 콕스 의원 사망: 인류와 이상주의, 민주주의가 공격받았다

* 영국 노동당 조 콕스(Jo Cox, 41) 의원이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영국 정치권을 비롯해 모든 영국 사회가 노동당의 미래로 촉망받던 유능하고 열정적인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일간지 <가디언>도 “The Guardian view on Jo Cox: an attack on humanity, idealism and democracy”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습니다.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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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야만 사이의 간극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모든 폭력 범죄가 질서 잡힌 사회를 추구하는 이상에는 흠집을 남긴다. 하지만 특히 그 범죄의 희생양이 평화적으로 법을 제정해 그런 질서를 구현하려던 바로 그 사람이 된다면 상처는 훨씬 더 깊을 수밖에 없다.

조 콕스 의원에게 길거리에 총을 쏘고 그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범인은 우선 두 아이의 엄마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악당이다. 하지만 이 범행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향한 공격이기도 하다. 오늘 숨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틀리(Batley)와 스펜(Spen) 선거구 유권자들이 자신을 대표해 뽑은 의원이다. 초선 의원 콕스는 지역구 현안을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지역 유권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런 콕스 의원에게 저지른 범죄는 곧 영국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민주주의와 시민적 가치에 총격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조 콕스 의원은 그저 평범한 의원 가운데 한 명이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하고자 애를 쓴 정치인이다. 콕스 의원은 지난해 자신의 첫 번째 의정 연설에서 누구보다도 유창하게 이를 설파했다.

영국 사회는 이민자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튼튼하지 못했을 겁니다. 전국 곳곳의 아일랜드계 가톨릭교 신자든, 인도 구자라트 지방 출신 무슬림이든, 아니면 파키스탄의 주로 카슈미르 지역 출신의 무슬림이든 관계없이 영국 사회는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영국이 다양성의 사회라고 하지만, 저는 지역구 곳곳을 다닐 때마다 우리를 갈라놓는 피부색, 종교, 출신 배경 등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 똘똘 뭉쳐 있는지를 발견하고는 놀라곤 합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그 차이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만큼 숭고한 이상이 또 있을까? 너와 나의 차이를 강조하고 구별 짓고 차별을 조장하는 대신 우리는 모두 결국 같은 인류라는 사실을 가장 앞세우며 통합과 연대를 좇는 것만큼 숭고하고 훌륭한 정치가 있을까? 이런 이상주의는 종종 문화 상대주의 혹은 다문화라는 이름 아래 조롱받고 비방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떤 취급을 받던 이는 아주 소중한 가치다. 이런 이상은 콕스 의원이 삶의 터전을 잃고 벼랑 끝에 몰린 시리아 난민을 지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던 원동력이었고,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녀가 목숨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상일지도 모른다.

오늘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경찰은 범인이 “영국이 우선이다!”라고 현장에서 외치는 걸 들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확보하고 조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라 극우 정당, 극우 정치 이념의 추악한 민낯이다. 지난 런던 시장 개표 과정에서 국제도시 런던의 시민이 무슬림 시장을 당선시키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며 분노를 표출했던 그 분리주의적 편협함에 맞닿아 있다. 극우 정당은 콕스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번 공격을 규탄했다. 하지만 이들이 끝없이 영국 사회에 주입하고 있는 분노와 비난은 이번 공격의 범인처럼 특히 벼랑 끝으로 몰린 계층의 사람들을 자극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다. 서구의 인종차별주의와 이슬람에 대한 공포는 사실 IS나 알카에다 등 극단주의 세력이 테러리스트를 모집하고 이들을 자살 테러범으로 훈련하고 키워내는 데 이용하는 극단적인 이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국 사회 안에서 점점 목소리를 키워 온 분리주의와 분노의 정치는 이런 식의 폭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영국은 이민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영국 독립당의 나이젤 파래지(Nigel Farage)는 마침 오늘 대단히 혐오스러운 포스터를 공개했다. 수많은 난민 인파가 비행기를 가득 메운 사진을 배경으로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유럽연합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포스터의 제목은 한계점, 혹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뜻의 “Breaking point”였다. 이들이 명백한 사실을 토대로 주장을 펼쳐주기를 더는 바라지도 않는다. 사실 시리아나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난민 위기가 유럽연합 때문이라는 주장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것이고, 난민 협약 가입 여부와 유럽연합 회원국 자격은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이들은 이런 불편한 진실을 오래전부터 깡그리 무시해 왔다. 그래도 진실에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억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 후진적인 정치가 우리 시대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외면하고 난민과 희생자들을 더욱 벼랑 끝으로 밀어내라는 혐오의 메시지를 설파하는 패륜의 정치로까지 변질하지는 않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콕스 의원의 이상은 그토록 잔혹한 냉소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녀의 삶과 정치, 꿈을 오래도록 기려야 한다. 그녀가 헌신적으로 구현해 온 가치는 결국 야만이 우리 사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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