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워싱턴 포스트에 자살 유가족인 에이미 맥도웰 말로우(Amy McDowell Marlow)가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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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방에 목을 매고 숨져있던 아버지를 본 그 순간부터, 제 인생은 송두리째 달라졌습니다. 그 장면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고, 그 순간의 고통은 오늘도 여전히 저를 괴롭힙니다.
저는 그 당시 13살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고, 명문 미시건 대학을 졸업한, 록 음악을 사랑하던 남자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근사한 차 뒷자리에서 창문을 조금 내리고 세차게 달리며 아버지가 좋아하던 노래들을 듣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아버지를 쳐다보면, 아버지는 그의 검정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반짝이는 파란 눈으로 저와 눈을 맞춰주었습니다. 거실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는 트럼펫을 불고, 저는 색소폰을 불곤 했습니다. 저희 귀에 그 음악은 끝내줬었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형편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당시 불과 13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고, 아버지가 정신 건강상의 문제로 수년간 힘겨워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변해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생기 넘치던 그가 왜 갑자기 그렇게 늘 피곤해 보였고, 왜 그렇게 위축되었었는지, 왜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빛나던 아버지의 눈에서 왜 총기가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음악이 있던 자리는 어느샌가 죽음과 같은 침묵만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는 스폰지처럼 그저 제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끔찍한 침묵을 받아들였고, 그 기저에 자리한 공포와 불안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갔습니다. 저는 그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누구에게 아버지가 처한 상황에 관해 묻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집을 조금씩 잠식해가는 어두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폭풍 전야와 같았습니다.
공포에 가득 찬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무슨 일 있어요?” 그의 파란 눈동자는 심연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에이미(Amy), 아빠가 지금 상태가 좋지 않아.” 이해할 수 없던 저는 “아빠 그러면 언제 나을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 앞에서 겁을 먹은 채로, 문을 꽝 닫고 문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전형적인 사춘기의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저를 따라서 나와주길 기대했습니다. 이 상황을 설명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흘 뒤,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저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저는 자살 유가족이 되었고, 트라우마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아버지의 자살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아버지가 스스로 숨을 거둔 날 경찰관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발생한 사태에 관해 설명했을 때, 저는 그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아빠 진짜 죽은 거예요? 아저씨가 우리 아빠 다시 데려와 줄 수 없어요?
그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얘야. 너희 아빠를 내가 돌려올 순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미안하다.”
그 이후 제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고, 저는 세탁방에 매달린 아버지를 발견하는 그 순간을 지속적으로 다시 경험하곤 했습니다. 공포에 질려 잠에서 깨곤 했고, 다시 잠들면 또 다른 비극이 우리 가족을 덮칠까봐 두려워서 잠을 못 이루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스스로 계속 되물었습니다. 왜? 도대체, 왜 아빠는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왜 떠나야만 했을까? 저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 이토록 큰 고통을 준 한 남자 사이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13살짜리 아이의 시선에서, 결국 문제는 우울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우울증은 정신 질병이 아닌, 막을 수 없는 절대 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의 우울증이 눈에 띄게 심각할 만큼 악화되면서 우리 가족은 아예 아버지의 정신 건강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또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꺼렸습니다. 그 단어는 또다시 제가 견딜 수 없는 질문–아버지는 왜 목숨을 스스로 끊었을까–으로 환원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저의 지인은 아버지를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떠난 겁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는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를 후벼 파던 고통과 트라우마, 그리고 부끄러움과 죄책감까지 모두 제 안의 깊은 곳에 묻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경험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공감과 지지를 받기보다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험에 지쳐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대화를 나눌 때, 아버지 이야기를 피해 가는 데 고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결국, 저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느낄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10대와 20대 내내 저는 제 안의 고통을 잠자는 한 마리 용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마음속 깊이 그것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깨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삶은 그렇게 계속되었습니다. 제 주위엔 많은 친구가 있었고, 저는 명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게 좋아 보였습니다.
제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저의 어머니는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아왔던 제 내면의 고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저는 먹기를 거부했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차 안에서 똑같은 슬픈 노래들을 반복해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심리치료사에게 제 증상을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에이미, 당신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요.
제게는 마치 사형선고와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정신 질병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우울증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신 질병이 제 문제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었고, 당연히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울증은 치료가 필요한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우리 가족에게 신이 내린 저주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제 생각과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지 못해 약물치료를 시작하기로 하고, 심리 치료도 지속적으로 받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버지에게서 우울증을 감추고, 업무적으로 성공하는 능력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워싱턴 DC에서 성공한 노동법 변호사였고, 저 또한 회사에서 인정받는 커뮤니케이션 디렉터였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모두 성공적이었고, 저는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정신 질병은 제가 회사에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저도 다른 사람들이 제 우울증을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저의 정신 질병이 저의 명성을 해치고 저의 앞날을 가로막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슬픔과 공포가 엄습할 때도 저는 동료들에게 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과장되게 웃음 지으려 노력했고, 저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정신 질병을 가지고 사는 수많은 사람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습니다.
(그림 출처=세계 보건 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I had a black dog, it’s name was depression)
결국 서른한 살 되던 해에 제 안에 잠자던 용이 깨어났습니다. 의사의 동의 하에, 저는 임신을 준비하며 우울증약을 조금씩 줄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6개월간 저는 우울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지난 18년간의 슬픔과 불안,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마치 쓰나미처럼 저를 덮쳐왔습니다. 공황 발작이 시작되었고, 저는 제가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감에 휩싸였습니다. “나를 잡아줘요.” 저는 남편을 양팔로 잡으며 절박하게 말했습니다. “잡아줘요. 난 지금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어요.”
결국, 저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첫 공황 발작 이후로, 1년간 저의 정신 건강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불안정하고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정신과 병원에 스스로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간 병원에서 집중적 치료를 받았습니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렇게 또, 제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동안 제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을 것과 같은 그 고통을 겪은 뒤에야 우울증과 불안이 저의 나약함이나 잘못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질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정신과적 치료가 저의 증상을 낫게 해주고 있었으며,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국, 제가 우울증을 안고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됐습니다. 저는 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울증이 자살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된 순간,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제가 더 강해질 때마다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제 우울증을 더 이상 숨기지 않을 것이라고요. 저는 이제 ‘자살’이라는 단어를 당당하게 사용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 저는 <위싱턴포스트>에 실렸던 (죽음의 원인을 자살이 아닌 심장 마비라고 썼던) 아버지의 부고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삶이나, 그의 정신 질병, 그리고 그의 자살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침묵은 여기서 멈추어야만 합니다.
오늘 퇴근하는 길에 라디오에서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 중 하나인 돈 맥클린(Don McLean)의 “아메리칸 파이”가 흘러나왔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는 차창을 내리고, 귀가 아플 정도로 볼륨을 높였습니다. 저는 노래를 크게 따라부르며 울었습니다. 저 자신이 고통을 숨기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녁 하늘은 석양의 빛에 물들어 있었고, 그 날따라 더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에
나는 아직도 그 음악이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었는지
기억나요
아빠, 잘 지내요? 거기서는 아빠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아빠 더글라스 시드니 맥도웰(Douglas Sidney McDowell, 1941.8.31-1996.5.1)을 기리며
에이미 맥도웰 말로우(Amy McDowell Marlow)는 자살 유가족으로, 20년째 우울증과 불안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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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의 글이네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