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무른 군주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시점을 맞이하여 이코노미스트가 영국의 군주제를 둘러싼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합니다.
군주제 반대론:
미국 백악관이 정치 안정을 위해 영국식 모델을 따르기로 하는 미래를 상상해봅시다. 2016년 대선은 취소되고 오바마 대통령이 죽을 때 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이후에는 딸인 말리아 오바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것이죠. 미국인들은 이런 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세습 군주제는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덜 나쁜 제도로 판단된 민주주의 및 성과주의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국왕이 예전처럼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는 반론이 나오겠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전히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조약에 서명할 수 있으며, 의회를 해산할 수도 있죠.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런 힘을 마구 휘두르려 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지만 세습제의 문제는 다음에 어떤 사람이 왕이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세상 모든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윈저 가에서도 나쁜 사람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으니까요.
또 영국에는 왕실이 의회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탓인지, 실질적으로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합니다. 성문 헌법조차 없죠. 1981년 스페인 국왕이 TV 연설을 통해 쿠데타를 막아낸 것처럼, 왕실이 최후의 순간에 나라를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왕정주의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군주의 역할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세습제와 같은 무책임한 제도로 군주를 고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설문조사 결과로 보나 왕실 기념품의 매출로 보나, 영국 왕실은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실이 국가 이미지에 반드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닙니다. 영국은 오만하고 계급에 집착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국 사회의 계층 이동성은 미국보다 크지만, 인기나 재능, 성실함이 아닌 혈통 덕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군주 덕분에 이런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국가 원수가 선거로 뽑힌다면 영국은 더 강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선거를 했는데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뽑힌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죠.
군주제 찬성론:
지난 20년 간 군주제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국 국민 중 군주제를 유지하자는 사람이 공화정으로 가자는 사람보다 세 배가 많았죠. 정치인 일반에 대한 혐오를 제외하면 영국인들이 이렇게 일치단결하는 주제를 찾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영국 국민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당연히 군주제 폐지란 엄청나게 넘기 힘든 산입니다.
인기 있는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려면 변화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현 제도가 나라에 큰 해악을 끼친다는 점을 증명해야 합니다. 전자는 이미 답이 나온 문제고, 후자 역시 증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군주제 유지에 큰 비용이 든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왕실의 존재로 인한 관광 수입이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국가 홍보 효과는 그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선출된 국가 원수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고 해서 비용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군주제가 엘리트주의와 계급제를 고착화시킨다는 비판도 있지만, 공화제를 택한다고 그런 것들이 사라지리라는 기대는 환상에 가깝습니다. 왕실이 존재하는 덴마크나 노르웨이, 스웨덴은 오히려 미국보다 훨씬 평등한 사회입니다. 성과주의도 미국보다 훨씬 잘 자리를 잡았죠. 민주주의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그 후계자가 그와 같은 권력을 실제로 휘두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공허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영국 국민들이 나서서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할 겁니다.
왕실의 상징적인 의미도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만에 하나 영국 사람들이 나라의 모든 제도와 기관들을 경멸하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있다는 건 중요합니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선출직 지도자보다는 왕실이 그런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고요.
또한 왕실은 영국인의 전통 사랑과 애국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군주제에 해악보다 장점이 많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이를 지지한다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엄청난 노력과 자원을 들여가며 굳이 폐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군주제 개혁론:
군주제 폐지론자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21세기에 민주주의 국가를 새로 만들어낸다면 세습 군주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지난 반 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성공적인 민주 사회는 그 나라가 가진 역사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고, 영국의 민주주의 역시 군주제와의 공존 속에서 발전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군주제를 다 타고 올라온 사다리처럼 걷어차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군주제를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군주제가 사회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영국처럼 정체성이 뚜렷한 지역들로 구성된 나라에서 왕실은 나라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문 헌법이 없는 나라에서 군대의 충성을 받는 존재가 총리보다는 왕실인 것이 낫기도 합니다.
왕실이 당연한 듯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는 현실에는 분명 어처구니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만, 영국 대중에게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설득하려면 더욱 확실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또, 단순히 억압의 상징을 철폐하자고 외치기보다는 그 후에 어떤 대안을 마련할 것인지를 분명히 제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완벽한 대안이 없어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식 모델은 고려 대상이 못 됩니다. 미국식 모델을 따른 나라들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세기 안에 헌정 실패를 맞이했습니다. 의원내각제와 결합한 대통령제는 여러 국가에서 잘 작동하고 있지만, 식민 지배가 아닌 현지의 왕실이 있는 경우 군주제에서 평화롭게 이행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군주제를 지금 모습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군주제가 한데 얽혀 유지된 탓에, 현재 영국의 정치 제도는 다수당의 지도부가 지나치게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하되 그 헌법적 근거를 벨기에식으로 바꿈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벨기에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으며, 군주는 타고난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함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군주란 국민들의 주권을 수호하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 이는 현재 영국이 필요로 하는 개혁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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