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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샤를리 엡도가 아닙니다

샤를리 엡도 작가들은 지금 표현의 자유를 대신하는 순교자로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해집시다. 만약 샤를리 엡도 작가가 그런 풍자 신문을 미국 대학 캠퍼스 안에서 발행하려고 했다면, 아마 30초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학생과 교수들은 그런 만평을 “증오 발언(hate speech)”라며 비난하고 나섰을 겁니다. (만약 그런 신문이 있었다면) 대학 당국은 지원을 중단하고 폐간시켰을 겁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에게는 참지 않으면서 프랑스에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모욕한 이들은 쉽게 영웅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벌어지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돌아봅시다. 일리노이 대학은 동성애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견해를 가르친 교수를 해임했습니다. 캔사스 대학은 전미총기협회(NRA)를 반대하는 거친 트윗을 쓴 교수를 정직시켰습니다. 반더빌트 대학은 대학이 기독교 신도들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기독교 단체의 승인을 취소했습니다.

미국인은 샤를리 엡도가 예언자 무하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발행한 것에 대해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무하마드를 비판했던 여성 이슬람 사상가 아얀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가 대학 캠퍼스에 초대된다면, 그녀를 연단에 세우지 말라는 청원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순간인지 모릅니다. 파리에서 작가와 편집자들이 학살당한 비극에 우리가 몸서리치는 이 때가 바로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선동과 풍자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를 되돌아 볼 좋은 기회입니다.

제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어제 당신이 페이스북 페이지에 무슨 글을 올렸든지 간에, 요즘 페이스북에서 유행하고 있는 ‘Je Suis Charlie Hebdo’ 즉 ‘나는 샤를리 엡도다’라는 주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적절치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샤를리 엡도가 했던 그런 폭력적인 유머와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당신이 열 세살 소년이라면, 다른 이들의 종교적 신앙을 조롱하고, 공권력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부르주아를 놀라게하자”(épater la bourgeoisie)라는 식으로 도발하는 게 용기있어 보이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런 짓이 유치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 대부분은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쪽으로 성숙할 것입니다. (자신의 잦은 우스꽝스러움을 더 잘 인식하게 될 수록 남을 조롱하는 일이 재미없어집니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믿음과 욕망을 가진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마음을 내비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모욕하기보다 그들의 견해를 경청하고 열린 대화를 하려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동가나 기이해보이는 인물들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잘 압니다. 풍자와 조롱은 우리의 자부심 뒤에 숨은 약점과 허영을 폭로하고, 성공한 자들의 자기 선전을 공격합니다. 풍자와 조롱은 ‘낮은 이들의 힘(the mighty low)’를 불러오며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킵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끼리 서로 부대끼며 살아야 할 때 풍자와 조롱은 효과적인 통합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은 궁극적인 유대감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풍자와 조롱은 근본주의자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 근본주의자란 무엇이든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근본주의자는 자기 종교가 깊이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점과 또 대부분의 종교는 기괴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풍자와 해학은 근본주의자가 자기 스스로를 돌아 보며 웃을 줄 모른다는 점을 폭로하고 나머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웃을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존중과 예의의 선을 지키고 싶은 동시에, 그 예의와 취향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예술가들을 위한 여지도 남겨두고 싶습니다.

만약 이런 법, 언어 규범, 특정 인물의 발언을 금지하는 것으로 미묘한 균형을 세우려 한다면, 그 결과는 서투른 검열과 대화의 말살로 나타날 것입니다.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고, 발언 지침을 만들고, 연설 금지자 명단을 인위적으로 만들려 시도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합니다.

다행히도 사회 상식은 법이나 규범보다 더 융통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는 예의와 존중의 선을 지키는 동시에 풍자와 해학의 공간을 열어두는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선 어른의 식탁과 아이의 식탁이 따로 있습니다. <르 몽드>나 공신력 있는 매체를 읽는 사람은 어른의 식탁에 앉습니다. 앤 콜터(Ann Coulter, 보수 논객)나 빌 마(Bill Maher, 코미디언)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어릿광대들은 아이의 식탁에 앉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아무도 말하지 않는 필요한 말을 해 줄 때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적인 언사는 인기가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건강한 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지만, 표현의 방법과 정도에 따라 사회적 대접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현명하고 사려깊은 학자의 말은 깊이 존중을 받으며 경청됩니다. 해학가의 말은 적당히 가려가며 듣게 됩니다. 인종차별주의자의 발언은 비난을 받습니다. 자기 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행동을 통해 신뢰를 먼저 얻어야 합니다.

샤를리 엡도의 학살은 우리의 이런 언어 금기를 없애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격적인 목소리를 법적으로 용인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회적인 차별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죠. (사회적으로 차별적인 발언에도 법적인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원문출처: 뉴욕타임스

(이 기사의 번역 일부는 듀나게시판(djuna.kr)의 Nico님의 번역을 참고하였습니다.)

신호철

View Comments

    • 오역을 수정했습니다. 지적해주신 '지나가다'님과 듀나게시판의 Nico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기사 말미에 관련 크레딧을 표기했습니다.

  • '표현의 방법과 정도에 따라 사회적 대접이 다를 수 있다는 점' 은 맞지만 그 대접이 총기로 무장한 괴한들이 들이 닥쳐 사살되는 거라면 분명 문제가 있지요.

  • 좀 시간을 두고 기사를 내보내는게 좋았을거 같은데...
    아직은 분노의 감정들만 남아있고 이런글을 받아들일 시기는 아닌듯도.

  • 파리의 사건은 참으로 비극이죠. 물론 샤를리 옙도 작가들을 희생한 과격단체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샤를리 옙도 작가들의 행동도 정당화 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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