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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으로 보는 미국의 역사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식탁 위에는 칠면조가 오르겠지요. 무엇보다 칠면조는 북아메리카 토종 동물로 일찍이 벤저민 프랭클린은 시체 고기나 뒤지는 대머리 독수리보다 칠면조를 “훨씬 더 존중받아야 할 새”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상징이 된 독수리나 명절 음식의 상징이 된 칠면조보다 더 깊이 미국 문화에 영향을 끼친 조류(鳥類)가 있으니, 그건 바로 닭입니다.

1607년 영국에서 출발해 신대륙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최초의 이주민은 닭 한 무리를 가져왔는데, 이 닭은 혹독한 첫 겨울동안 식민지에서 살아남는 데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이후 13년 뒤 도착한 유명한 메이플라워호에도 닭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칠면조, 거위, 돼지, 오리, 맛있는 토종 사냥감 등이 넘쳐나면서 구세계의 가금류, 닭의 인기는 시들해졌습니다.

닭은 흑인 노예에게 요긴한 것이었습니다. 노예가 자기가 키운 동물을 팔아 모은 돈으로 자유를 살 까봐 걱정됐던 1692년 버지니아 주의회는 노예가 말, 소, 돼지를 키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닭을 비롯한 가금류는 굳이 고려할만한 가치가 없었는지 금지 항목에서 빠졌습니다

그 빈틈은 노예에게 기회가 됐습니다. 노예는 대부분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왔는데, 그 지역은 오랫동안 닭을 키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남부 식민지에서 흑인은 (노예든 자유민이든) 닭 상인으로 떠올랐습니다. 조지 워싱턴의 고향인 마운트 버넌에선 노예가 오리나 거위를 키우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 오직 닭만이 “흑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즐거움은 요리뿐 아니라 돈을 버는 것도 포함됩니다. 1775년 토머스 제퍼슨은 은화 두 닢을 노예에게 주고 닭 세 마리를 사는 거래를 했습니다. 그런 매매는 흔했습니다.

흑인 요리사는 주인의 식사 메뉴에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백인들도 닭고기를 즐기게 됐습니다. 서아프리카 문화 가운데 백인을 사로잡은 사례를 꼽으라면 대표적인 것이 닭고기 조각을 기름에 튀겨 먹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 요리는 전 세계에 퍼진 미국 대표 문화가 됐습니다.

흑인 노예가 미국에게 닭고기 입맛의 기초를 닦아줬다면, 현대적인 닭 품종 개량을 가능하게 한 것은 1840년대 서부에 들어온 중국 바람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상선은 아시아산 닭을 가져왔는데 미국에서 그 전까지 못 보던 것이었습니다. 크고 다채로운 색깔의 동양종과, 작지만 강한 서양종이 서로 교배되면서, 더 많이 달걀을 낳고 더 많은 육질을 제공하는 닭이 탄생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플리머스 록, 로드 아일랜드 레드같은 유명한 변종입니다. 미국이 산업화시대로 접어드는 그 때 이 닭들은 미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한 때 닭걀을 낳는 목적으로 길러졌던 닭이 점점 돼지고기나 소고기처럼 직접 식용되는 목적으로 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닭은 영세한 소규모 가족 농장에서 길러졌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유대인 수백만 명이 이주해오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유대인에게 닭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습니다. 1900년에 뉴욕 시에는 코오세르(유대인 율법에 따른 조리법) 정육점이 1천500 곳에 달했습니다. 중부 대농장에서 실려오는 살아있는 닭들이 기차 화물칸을 채웠습니다. 중부의 시골 여성은 당시 대부분 가금류 사육업에 종사하며 증가하는 닭 수요를 충당했습니다.

닭고기 시장은 유대인 이민자 수요를 훌쩍 넘어 확장됐습니다. 중서부와 남부 농장에서 일하던 수백만 미국인이 공장 일자리를 찾아 북부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믿을만하고 값싼 단백질 공급원이 절실했습니다. 돼지고기와 소고기는 도시 노동자에게는 너무 비쌌고 미국산 달걀은 그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닭고기 산업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닭 산업을 부흥시키는 또다른 계기가 됐습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군인에게 전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1923년 셀리아 스틸이라는 이름의 델라웨어 사업가 여성이 처음으로 브로일러(달걀을 낳지 않는 닭)라는 품종의 닭을 판매했습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산업이 탄생한 것이죠. 역사상 처음으로 닭은 (달걀을 낳는 용도가 아니라) 오로지 육질 그 자체를 위해 대규모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닭의 전성시대는 대공황 때도 변함없어서 닭 농장 농부를 연명할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농업부 장관과 부통령을 역임했던 채식 평화주의자 헨리 A. 왈라스는 닭은 가난에 시달리는 시골 미국인의 구원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1950년대가 되자, 적은 사료만 먹고도 아주 빠르게 성장하는 닭 품종이 나왔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닭이 번성하게 됐습니다.

요즘 닭 값은 저렴해졌고 미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고기가 됐습니다. 이 햄버거의 나라에서, 미국인은 소고기보다 닭고기를 더 많이 먹습니다. 추수감사절는 물론 닭보다 칠면조가 더 주목을 받지만, 한 해 전체로 보면 닭은 칠면조보다 5배 더 소비됩니다.

값싼 고기와 달걀을 제공하는 닭이 여러 방면으로 유용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부분도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공장형 밀집 사육을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은 산란용 닭과 고기용 닭을 가리지 않고 수십억 마리의 닭이 규제를 벗어나 대형 창고에 갇혀 사육됩니다. 이 ‘닭 공장’ 처리장에는 저임금 노동자가 추위와 어둠속에서 일하느라 높은 산업재해율에 시달리고, 닭 공장의 공해 물질은 상수도를 더럽힙니다. 대량 생산으로 길러진 닭은 상대적으로 맛이 없어 향신료나 소스와 함께 먹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날 우리가 감사와 축하를 나누는 그 때에, 닭이 얼마나 미국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는지를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찮아보이는 이 동물은 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인간에게 주는 존재입니다.

원문출처: 뉴욕타임스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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