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테(Verité)라는 NGO가 발표한 최근 조사 결과, 말레이시아의 전자 산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현대판 노예제라 부를 만한 강제 노동, 인권 유린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리테는 제품 생산 과정(supply chain)의 공정성, 책임 문제 등을 주로 감시합니다.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500여 명을 상대로 심층 면접을 실시했는데, 대부분 노동자들이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고, 공장주나 소개인들에게 여권을 압류당하는 이들도 태반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주로 인도나 방글라데시, 네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이웃 나라에서 오는데, 이들은 직업소개소 같은 브로커를 통해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이미 적지 않은 돈을 소개비로 내느라 본국에서 빚을 지고, 말레이시아 현지 브로커에게 이중으로 소개비를 강탈당하는 경우도 많으며,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여권을 비롯한 신분 증빙 서류를 불법으로 고용주에게 압류당한 채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합니다. 이들이 모여 사는 숙소의 위생은 엉망이고, 여성 노동자들은 성폭력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습니다. 이는 특정 기업이나 업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미국, 유럽연합, 일본, 한국, 대만 등 원래 기업의 국적을 가릴 것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거의 모든 전자 업체에 만연한 문제라는 겁니다.
조사 결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77%가 브로커에게 소개비를 내기 위해 본국에서 빚을 졌으며, 95%는 자신이 영원히 지금 지고 있는 빚을 갚지 못해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할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본국을 떠나는 과정부터 노동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사기와 협박 등 각종 불법의 온상이지만, 말레이시아 당국은 이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지난해 말레이시아 정부는 법을 바꿔 고용주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세금의 일부를 전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빚은 평균 40만 원 정도 늘어났습니다.
올해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전 세계 인신매매 동향 보고서에서 말레이시아는 현대판 노예제를 근절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최하 등급을 받았습니다. 보고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4백만 명 가운데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받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갖은 협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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