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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트윗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사과문

[역자주: 무신론자로 유명한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최근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출산하는 건 비도덕적이라는 트윗을 썼다가 세계 각지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아래는 도킨스가 8월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입니다.]

용감하게도 제 트위터 계정을 보러오는 모험을 하신 분들은 지난 8월 20일 제 트윗이 만들어낸 광란의 현장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주제는 다운증후군 태아 낙태의 도덕성이었습니다.

다운 증후군 환자는 정상인의 경우 2개가 한 쌍인  21번 염색체를 3개 가지고 태어납니다. 증상은 다양하지만 대개 기형적인 외양, 비정상적인 성장 패턴, 정신 장애 등을 보입니다. 기대 수명은 적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더라도 마치 아기를 다루듯 특별히 보호해야 합니다. 물론 다운증후군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정상인 아이였을 때와 다름없이 깊은 애정으로 아이를 돌볼 것입니다. 그 감정은 진실하며 상호적이고, 아마도 제가 경험한 (아래에 있는) 분노의 트윗 일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염색체 이상 검사는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임산부가 특정 조건의 아이를 낳을 확률이 높을 때 받게 됩니다. 다운증후군이 발견되면 부모는 대부분 낙태를 선택하며, 의사 역시 그러길 권합니다.

어제 제 홈페이지의 훌륭한 고정 독자이신 한 여성 분께서 만약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어찌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트위터로 질문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 대답 앞에 @마크를 붙이고 트윗글을 썼는데, 그렇게 하면 저와 그녀를 동시에 팔로우하는 사람에게만 그 글이 보이는 건 줄 알았습니다. 팔로워 1만 명 모두에게 보이려는 의도는 없었지요. 하지만 많은 분이 타임라인에 제 글이 뜨지 않음에도 (직접 제 트위터 계정을 방문함으로써) 그 트윗을 읽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서 제가 언급한 것처럼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광란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제가 만약 140자 이상을 쓸 수 있었다면 그 여성 분에게 이런 답을 하려고 했습니다.

“분명히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 제 의견이 도움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라면 낙태할 것입니다. 당신이 아이를 절실히 원한다면 다시 임신을 시도하는 건 어떨까요. 낙태를 하느냐, 다운 증후군 아이를 세상에 내놓느냐 중 택일하라면 도덕적이고 현명한 선택은 낙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미국, 특히 유럽에서 임산부 대부분은 낙태를 선택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한 발 더 나가서, 만약 당신의 도덕성이 저와 마찬가지로, 행복의 합을 크게 하고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바램에 기초하고 있다면, 임신 초기 낙태 기회를 버리고 다운 증후군 출산을 강행하는 건 비도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생각이 논쟁을 일으킬 수 있고, 더 논의가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아마도 평생 아기를 키우듯 성인 자녀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아이는 아마도 수명이 짧겠지만, 만약 그 아이가 당신보다 오래 살게 될 경우, 당신이 죽고 나면 누가 그 애를 돌볼 건지 걱정해야 되겠지요. 이 경우 다수가 낙태를 선택한 건 놀랍지 않습니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의 것이며, 전 당신이나 다른 누구에게 제 견해를 강요하려고 시도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제 조언을 기다리는 한 여성에게 드리려 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140자가 넘습니다. 이걸 트위터에 맞게 압축한 결과, 당연하게도 비정하고 싸늘한 문장이 됐습니다. “낙태하고 다시 임신을 시도하라. 기회가 있었는데도 낙태하지 않고 출산하는 건 비도덕적이다”라구요. 물론 저는 그토록 많은 분노를 불러 일으킨 축약법을 쓴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 혼란 그 자체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를 미워하시는 분들은 여러 부류가 있으셨습니다: –

1. 먼저 어떤 상황에도 낙태를 반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를 미워하시는 대부분은 이 범주에 해당합니다. 오래된 논쟁을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글을 보는 독자 대부분은 익히 알다시피 전 여성이 임신 초기에 낙태할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셔도 좋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로 낙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비단 제 의견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의학적 견해, 그리고 실제 그 선택에 직면했을 때 많은 임산부가 내렸던 결정 모두를 반대하셔야 합니다.

2. 또 제가 거만하게도, 여성 스스로 선택하게 놔두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이건 절대적으로 제 의도가 아니었고 축약된 글이 그렇게 보였다면 사과드립니다. 제 진짜 의도는 140자 길이의 한계에 대해 언급했듯, 단지 저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한 것이었고, 제 도덕 철학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뿌리두고 있음을 설명하려 했을 뿐입니다.

3. 실제 여성 대부분이 낙태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게 마치 일종의 다수의 폭력을 옹호하는 걸로 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국민투표 결과 교수형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수형은 옳다”는 논리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수의 폭력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에게 나치즘이라느니, 냉혈한이라느니 하며 비난을 퍼붓는 것은 실존적인 딜레마에 마주하고 있는 여성 대부분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것과 같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한 개인을 짐승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그 사람이 대다수 사람이 선택하는 사고방식을 따랐을 뿐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4. 제 견해를 히틀러의 우생학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런 생각은 제 머리에 있어본 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운증후군은 유전될 확률이 거의 0에 가깝습니다. 그 말인즉, 비록 다운증후군이 선천적인 질병이긴 하지만, 삼염색체 발현이 유전적으로 상속되는 경향은 거의 없습니다. 당신이 우생학을 믿는 사람이라면 굳이 다운증후군을 검사할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5. 저를 비판하신 분 가운데는 다운 증후군 환자를 알고 있으며 그 환자를 사랑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제가 그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할 권리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감정에 관한 것이지 논리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낙태 토론을 할 때 흔히 발생하는 일반적인 가족의 오류입니다. 다른 버전으로 제 책 <만들어진 신> 8장에서 얘기한 “위대한 베토벤 이야기의 오류”가 있습니다. ‘이 다운증후군 태아는 지금 낙태되어야 한다’와 ‘이 사람은 오래전에 낙태되었어야 했다’는 말 사이에는 본질적인 도덕적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어떤 누구에게도 “당신은 태어나기 전에 낙태되었어야 했어”라고 말하는 걸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운증후군 태아가 “사람”이 되기 전의 시점에서, 낙태를 결정하는 것이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충분히 양립 가능합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의 정의(definition)를 두고 도덕 철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논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도덕적인 견지에서 어른이든 아이든 아기든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를 지지합니다. 하지만 신경 체제가 발전하기 전의 태아의 경우는 아닙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결론적으로, 제 주장은 단순히 우리 대부분이 지지하는 일반적인 낙태 선택을 논리적으로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제 어법이 서툴러 오해를 사는 데 취약한 면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적어도 이 문제의 절반은 굳이 오해하려는 불합리한 욕망에 기인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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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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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운증후군이 있는 자녀들을 데리고도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살아가려는 부모님들에게 도킨스는 무슨 변명을 하던 크나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혐오스럽군요.

    • 도킨스가 그러한 부모들을 염두에 두고 저런 트윗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본문에 보면 '물론 다운증후군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정상인 아이였을 때와 다름없이 깊은 애정으로 아이를 돌볼 것입니다. 그 감정은 진실하며 상호적이고, 아마도 제가 경험한 (아래에 있는) 분노의 트윗 일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지요. 도킨스의 해당 트윗이 나오게 된 건 다운증후군 아이를 가졌다는 가정 하에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의견을 구하는 여성 분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고, 자신의 평소 신념에 따라 용기있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A라는 질문에 대해 a, b, c 등 다양한 대답들이 가능하고 이를 존중하여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의 의견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의 발언을 함구하게 될테니까요. 님이 남긴 '혐오스럽군요'라는 말과 같은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

      • a,b,c등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듯이 저도 도킨스의 뒤늦은 변명이 혐오스럽다고 비난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믿고있습니다. 평소 신념에 따라 용기있는 발언을 했을 뿐이라면 애초에 누굴 의식해서 '사과'했는지 모르겠네요. "예의상 사과는 하지만 나는 틀린 말 한 적 없다"는 요지라면 그건 진정한 사과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 그럼 원하시는 대답이 몬가요? 낙태가 도덕적인 선택이지만 이리이리 잘못을 했으니 제가 틀렸고 저는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글인가요? 비난 하기는 쉽지만 행동은 쉽지 않습니다...역겹네요.

          • 옛 댓글에 계속 글이 이어지니 저도 조금 당황스럽군요.왜 이 댓글이 이렇게 미움받는지 도킨스씨처럼 의아할 정도입니다. 제가 '원하는' 대답이 뭐든 그분이 들을 일도 없는데 모르는 분께서 왜 궁금한지 모르겠네요. '비난하기는 쉽지만 행동은 쉽지 않다'는 말, 틀린 것 하나 없지요. 무게가 실리는 것은 행동이기에, 도킨스씨가 저 여성분에게 이래라 저래라 라고 애초에 행동을 건의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트윗 하나 올렸을 뿐이지만, 낙태에 대한 모든 결과는 여성분이 평생 짊어질테니까요. 이에 대해 도킨스씨도 2번에서 인정한 바고요. 어찌됫던 그 트윗이 혐오스럽다고 느낀것은 제 자연스러운 감정이었고, 한낯 범인(凡人)인 저의 이런 감정이 무서워서 함구한다면 그건 안된 일이네요.

          • [도킨스씨가 저 여성분에게 이래라 하고 애초에 행동을 건의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치면 도킨스씨가 답변할 수 있도록 질문한 여성, 즉 이래라 저래라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요청한 여성은 더욱 문제가 아닙니까?

            혐오를 왜 느꼈는지 이 해명글로 전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당신의 문제를 성찰해보고, 내가 어떻게 당신의 '혐오'를 이해할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선택의 문제에서 자유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칸트의 도덕은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하죠. 사르트르는 이 말이 옳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일 프랑스 청년이 전시상황에서 조국에 참전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도덕이 신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어머니곁에 있는 것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결단한 친구들을 방패(수단)삼아서 어머니를 간호하는 것이고, 반대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어머니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이 청년이 신부에게 질문하러 갔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상황이 달라질까요?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적합니다. "청년에게 주어진 것은 전적으로 자유밖에 없다. 왜냐면 그가 기회주의적 신부에게 찾아가 답을 구한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민족주의자 신부에게 찾아간다면 그 또한 이미 선택을 해놓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청년이 조언을 얻고자 한다면, 결국 그는 자신의 자유에 근거해 찾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신부를 선택하는 행위에는 이미 자신의 자유에 대해 어느정도 선택을 내렸음을 함축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랬을 때 이 선택이란 전적으로 자유에 다름아닙니다.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은 결국 때가 되어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그녀는 왜 신부에게 물어보지 않고 도킨스에게 물어봤을까요? 이 또한 여성은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도킨스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절치 않습니까? 도킨스는 무신론자면서 자신의 도덕철학에 입각해 답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자유롭습니다. 왜냐면 자유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이며, 이는 선택-책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따라서 당신의 혐오감을 [칸트적 명령의 잘못된 이해]로 해석합니다. 칸트적 도덕은 분명 정언명령이나, 도킨스는 이에 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유-책임을 더욱 옳은 독트린으로 봅니다. 즉 당신은 당신의 혐오감에 의해서, 즉 도킨슨의 명령질과 이에 따른 책임감의 부재를 지적하지만, 이는 여성이 진정 도킨스에게 물어보는 행위마저도 자유에 의한 선택이고, 따라서 이 선택에 따른 책임이 그녀의 책임임을 간과했다는 겁니다. 당신에게는 목적과 수단, 즉 여성을 수단으로 다룸의 지적만이 있지, 진정 목적을 선택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자유는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므로, 도킨슨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신의성실의 의무로 답했을 뿐이란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혐오는 도킨슨의 수사에 매달려서 그만 여성이 이같은 주장을 들을 책임을 도외시 했습니다. 그녀의 자유를 수단화한겁니다. 그러나 애초에 수단과 목적을 정하는 주체는 누굽니까. 그건 여성의 '자유'이지, 당신의 '혐오감'이 아닙니다. 첫 댓글에서 보이는, [다른 다운 증후군의 부모들에 대한 결례]는, 혐오감의 시발점이 애초에 존재하기 이전의 다운증후군 아기를 목적화하여 책임을 정언명령한 것에 다름아닙니다. 그러나 도킨슨의 주장대로, 신경체계가 갖춰지기 전의 태아는 여성의 전적인 자유-책임에 달려있는 겁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혐오감-도덕으로 인하여 여성의 자유를 수단화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것, 즉 절대적 도덕으로 귀착시키고 상대적으로 도킨슨의 신의성실의 도덕적 의무감은 도외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 도덕적 의무감은 도킨슨의 주장으로 인하여 여성의 자유-책임에 귀속된 것인데, 이를 누가 판단하려고 듭니까?

            요컨대 1.당신의 자연적인 감정은 칸트적 명령처럼 절대적 목적을 상정했지만, 구체적 상황은 여성의 자유-책임이란 겁니다. 그리고 2.여성이 애초에 자신의 자유에 대한 고뇌로써 다른 다운 증후군 부모-자녀를 목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습니다.(당신은 그것을 고려했지만요) 왜냐면 여성은 자신의 태아를 목적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주의적, 직관적 도덕관의 철학적 문제는, 칸트적 정언명령이 도덕판단의 대상의 지위를 구성하는 '나'에게 존재하는 "명령"임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혐오감에 의해서 자연주의적,직관적 도덕관을 구상하셨구요.

          • "도킨슨의 주장대로, 신경체계가 갖춰지기 전의 태아는 여성의 전적인 자유-책임에 달려있는 겁니다 ": 이 전제부터가 님과 도킨스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경체계가 갖춰지기 전의 태아'는 여성의 자유에 의해 목적으로 다뤄질 뿐 그 태아 스스로에게는 아무것도 고려할 것이 없다는 '명령'은 누가 내리는 것인가요? 자유란 양날의 검이고, 여성분의 자유를 제가 목적화하든 수단화하든 혐오감을 느낄 자유를 가지는 건 저도 매한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느낀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인 감정을 칸트 철학에 빌어 합리화하려고 한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위에서 가상의 프랑스청년 예시를 드셨는데, "기회주의적 신부에게 찾아가 답을 구한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민족주의자 신부에게 찾아간다면 그 또한 이미 선택을 해놓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면 이거야 말로마음속에서 답을 미리 정해놓고 듣고싶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취사선택하는 '자유'라고 보이는군요. 자기가 벤 아이를 도구화해서 이렇게저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먼저 믿은 뒤 여기에 긍정적인 확신을 받을 수 있는 유명한 진화론자 도킨스에게 찾아갔다는 것 아닙니까? 이 청년은 아전인수의 고수군요. "도킨스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타자에게 인정을 받아야하는, 인정받고싶어하는 자유는 과연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정한 자유라면 가상의 청년은 어떤 신부도 찾아가지 말아야하고, 이 여성또한 도킨스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 생각이 자연주의적/직관적 도덕관이든 무엇이든 철학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제 입장을 얼마든지 전문용어로 타자화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이 여성분의 자유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왈과왈부하지 말라는 결론이지만, 역으로 저의 '자연적인 감정' 또한 엄연한 사실이며 제가 고려한 다른 부모들이 느꼈을 억하심정 또한 가상의 프랑스청년 케이스따위를 들먹일 필요 없는 실제 사실입니다. 세상은 칸트와 철학자들의 언어로 구상된 가상세계가 아닙니다.

          • 저는 칸트명령을 잘못 실천한 것이 아니라 "도킨슨의 주장대로, 신경체계가 갖춰지기 전의 태아는 여성의 전적인 자유-책임에 달려" 있다는 전제부터가 저와 다른 것입니다. 여성이 자기 뱃속의 아이/생명체를 마음대로 할 힘은 신성불가침의 자유고 뱃속의 생명체의 존엄은 얼마든지 수단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그 전제 자체는 불변이란 말입니까? 이게 '도덕적 의무감'인가요?

            가상의 프랑스청년 가설을 드셨는데 "기회주의적 신부에게 찾아가 답을 구한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민족주의자 신부에게 찾아간다면 그 또한 이미 선택을 해놓고 가는 것" 이라면 이야말로 아전인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이미 듣고싶은 답을 정해놓고 여기에 확신을 더할 답을 줄 사람을 취사선택해 찾아갔기 때문이지요. 이걸 진정한 주체적 자유라고 할 수 있나요? "도킨스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함" 이라고 하셨는데, 남에게 인정을 받아야하는 자유는 진정한 주체적 자유라고 할 수 없지요. 저의 '자연주의적, 직관적' 도덕관(객체화를 참 잘하시는군요), 그리고 제가 도킨스나 이 여성분에게 느낀 혐오감을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할 필요를 못느끼지요. 자연스럽고 직관적이었으니까요.

            결국 guest님이 하고싶은 말은 이 여성분의 결정은 자신의 자유의 결정이고 제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만, 그 논리는 도킨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가상의 프랑스청년은 듣고싶은 말을 해줄 신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상담하지 않고 결정을 내려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성분은 그러지 않았죠. 결국 자기 결정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짐작해 찾아간 이 여성은 도킨스를 확신의 '수단'으로 대한 것이고 도킨스도 엄연히 여성이 홀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홀로 짊어지도록 내버려둬야할 일에 왈가왈부함으로서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본문에서 2번사과)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른 다운증후군 부모자녀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매몰차게 말씀하는 '명령'은 누가 내리는건가요? 세상은 철학자들의 전문용어와 이론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이 아닙니다.

  •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공개되었을 경우 이미 다운증후군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결례가 될 수 있음을 인지못했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부분은 변명이 필요한 거지요. 어쨋거나 실수한 부분이니까요.
    그럼에도 그 비난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습니다. 예기치못한 결례에는 사과하나 학자로서의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난에 못이겨 사과했다고 보이진 않네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사과만 있는걸요. 오히려 비난에 못이겨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면 더욱 모욕적인 언사가 되었을겁니다.

  • 다운증후군 아이를 평생 애정으로 키우는 사람도 있지만 눈물속에 키우며 걱정속에 죽는 부모도 많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했던 트윗이니만큼 틀릴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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