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역할이 없어도 얼굴을 비치는 것 자체가 정치인의 역할입니다. 유권자들은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최고 책임자가 현장에 나타나 주기를 기대합니다.
흑인 소년이 경관의 총에 맞아 숨진 후 혼란에 빠진 미국 미주리 주에서는 주지사의 한 박자 늦은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은 군 수준의 장비를 동원한 상황에서 제이 닉슨(Jay Nixon) 주지사가 사건 발생 후 5일이 지나도록 퍼거슨 시 현장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24시간 보도 채널과 트위터의 시대에 5일은 영원과도 같이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주지사 대변인은 닉슨이 사건 직후 법무부에 독립 수사를 요청하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돌보고 있었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도대체 주지사가 어디에 있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죠. 시위에서는 닉슨의 얼굴 사진에 “실종(missing in action)”이라는 단어를 적어넣은 팻말도 등장했습니다. 닉슨 주지사는 결국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퍼거슨을 찾아 시위대와 보도 인력에 대한 보호를 촉구하고 “무법 상태”에 대한 경고를 하는 등 최고 책임자로서의 조처를 했지만, 이번 일이 그의 정치 경력에 치명적인 타격이라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닉슨은 유력한 2016년 상원의원 후보였고 장기적으로는 민주당 대선 주자로도 거론되는 인물이었지만, 유권자들은 이번 일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자신을 증명할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닉슨 주지사가 그 간 아프리카계 커뮤니티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온 것도 이번 사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1990년대 주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일부 학교 내 인종차별철폐 프로그램 종식안을 지지한 이력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죠. 원래부터 소수 커뮤니티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비판까지도 나오는 이유입니다.
주지사가 이런 상황에서 언제, 어떻게 현장을 찾아야 한다는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각자 주어진 여건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옹호의 목소리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 다른 정치인들의 경험을 돌아보면, 위기 시 대응은 분명 정치인의 앞날을 결정짓는 역할을 합니다. 1969년 뉴욕에 폭설에 쏟아졌을 때는 시 당국의 늑장 대응으로 존 린지(John Lindsay) 시장이 사임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자주 오르내리는 사례입니다. 반면 허리케인 샌디 당시 단호하고 적극적인 대응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크리스 크리스티 (Chris Christie) 뉴저지 주지사의 경우처럼, 위기는 정치인에게 큰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닉슨 주지사 자신도 토네이도가 조플린 시를 강타했을 때 조치에 앞장서며 박수를 받았던 일이 있었죠. (Polit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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