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올해는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아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계 1차대전의 유산을 꼽아 정리했습니다. 무기나 전쟁사에 관련된 유산뿐 아니라 세계 질서와 경제 동향, 그리고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들로 20세기 세계사를 관통하는 인물, 사건들이 망라돼 있습니다. 원문의 인포그래픽은 월스트리트저널이 매긴 중요한 순서에 따라 정리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 인물편
–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Atatürk, 본명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1차대전에 연합국이 아닌 동맹국으로 참전한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장교였던 무스타파 케말은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지중해 제해권을 확보하고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를 공략했을 때 이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터키군도 30만 가까운 사상자가 났고, 연합군의 사상자까지 합하면 50만 명 넘는 병사가 죽거나 다친 이 전투를 치르면서 무스타파 케말은 군 내에서 명망을 얻습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패전국이 되어 무너지자, 무스타파 케말은 투르크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고 술탄을 폐위한 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을 건국합니다. 1938년 숨질 때까지 터키를 통치했으며 1934년 의회로부터 터키어로 “터키 (민족)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타튀르크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터키 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오늘날에도 지켜지고 있는 세속주의 원칙(종교와 정치의 분리)을 처음 세우기도 했습니다.
– 마타 하리(Mata Hari, 본명 마그레타 젤러, Margaretha G. Zelle)
네덜란드의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난 마그레타 젤러는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내며 현지 언어와 문화, 춤 등을 익혔습니다. 짧은 결혼생활 후에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국풍 춤을 대유행시키며 물랑루즈를 비롯한 사교가의 대명사가 됩니다. 이때 말레이어로 새벽의 눈동자 또는 태양을 뜻하는 마타 하리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죠. 1차대전이 발발하자 마타 하리는 프랑스군의 스파이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독일군 장군과 은밀히 만난 마타 하리는 이중간첩 혐의로 프랑스에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1917년 총살당합니다. 훗날 마타 하리의 사생활을 못마땅해한 프랑스 당국이 마타 하리에게 혐의를 덮어씌웠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마타 하리는 ‘미모의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 헨리 페텡(Marshal Henri Philippe Pétain)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독일군의 서진을 막아낸 페텡은 전쟁 영웅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전간기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으로 일하던 그는 하지만, 2차대전 당시 독일에 패퇴하고,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비시 정권에 부역한 혐의로 영웅이 아닌 역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연합국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뒤 자신의 까마득한 후배인 샤를 드골 장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고, 페텡은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9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토마스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아라비아의 로렌스)
토마스 로렌스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으며,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유적을 발굴하는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에는 영국군의 정보장교로 카이로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전쟁 중에는 중동 아랍 민족주의를 지원하며 오스만튀르크제국군과 싸웠습니다. 그의 이름과 활약상은 1962년 제작된 영국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전설처럼 남아 있습니다.
–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경제학자 케인즈는 전쟁 당시 영국 재무부에서 일했고,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케인즈는 경제적인 고려 없이 징벌적 차원에서 독일을 향해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는 근시안적인 정치공작의 현장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을 써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미국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더 많은 차관을 제공해야 하고, 유럽 국가들끼리는 자유무역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케인즈의 주장은 2차대전이 끝난 뒤에야 받아들여집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1929년 대공황이 닥치자, 케인즈는 대량 실업과 디플레이션 등에 맞서 정부가 지출을 늘려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케인즈의 영향은 소위 큰 정부를 지지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리키는 케인즈 학파라는 이름 아래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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