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이코노미스트지는 7월 4일 자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냈습니다.
“화요일 오후, 총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실과 정부, 국민들을 상대로 황태자와 그의 부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끔찍한 범죄에 혐오감을 금치 못한다는 내용의 조문을 발표했다. 애도와 분노를 유려한 언어로 담아낸 이 조문은 하원 전체의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비겁한 이 범죄에 박수를 보내는 사회가 있다면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가 비밀스러운 범죄 모의에 사회의 근간을 위협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심하고 어리석은 단체들이 방화와 살인을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하면서,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에게 수단이 목적으로 정당화되며 비겁하고 폭력적인 살인을 영웅적인 행위라 가르치는 시대이다. 혈통을 타고나서, 또는 선거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와 같은 위협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행위들이 폭군의 통치에 대한 저항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열한 행위임에는 변함이 없다. 1865년 암살된 링컨으로부터 1881년의 알렉산더 3세(**), 1900년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1913년 그리스의 요르고스 1세에 이어 이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에 이르기까지, 참사의 리스트는 길고도 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가 사라예보에서 암살자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것은 지난 일요일의 일이다. 이번 사건은 그의 가문에 끊이지 않았던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의 결정판과도 같았다. 황태자 부부는 지난주 수요일, 위험하다는 경고를 무릅쓰고 보스니아를 찾았다. 이틀간 산악지대의 군부대 방문을 마친 황태자는 일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환영 인파를 통과하여 시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가 미처 시청에 도착하기 전, 폭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 황태자가 팔로 폭탄을 쳐냈지만, 바닥에 떨어진 폭탄이 폭발해 뒤차에 타고 있던 수행원 4명과 구경꾼 20여 명이 부상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범인은 카브리노비치라는 이름의 인쇄공이었다. 이후 시청에서 약 30분간 머무른 황태자 일행은 다시 차에 올라타 부상당한 수행원들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차가 프란츠 조세프가와 루돌프가의 교차 지점을 지나는 순간, 주택 뒤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그중 한 발은 황태자의 뺨에, 한 발은 황태자를 보호하려던 부인의 몸통에 치명상을 냈다. 이들을 실은 차가 그대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숨진 후였다.
19세 학생인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처음에 공범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범행 현장 근처에서 폭발물이 발견되는 등, 이번 사건이 계획적인 범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프린치프가 심문 중에 자신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서 저명인사를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오랫동안 세우고 있었다고 선언했으며, 처음 폭탄을 던진 카브리노비치는 벨그라드의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폭발물을 얻었다고 자백했다.
암살자들의 범행 동기가 정치적이었다는 사실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죽은 황태자는 슬라브 민족에 동정적인 인물로, 그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슬라브인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에 제국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보스니아를 모두 아우르는 남부 카톨릭 슬라브 왕국을 세우고자 했던 황태자의 계획은 종교적으로도 그리스 정교회에 속해있고 그리스 문자를 쓰는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남부 헝가리와 보스니아 인구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의 꿈은 아드리아해 연안과 지중해까지를 포함하는 대 세르비아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한 범죄자의 미친 머릿속에서도 맴돌던 생각이었고, 이것이 사라예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누군가의 죽음, 특히 이런 식의 죽음은 신랄한 비판에 대한 방패가 되기도 하지만, 이제 와 고인이 정치인으로서 신뢰를 주는 인물이었다거나 합스부르크 왕가 내외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그는 현 황제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 우려를 불러일으키던 인물이었다. 고인은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에서 전쟁을 치르던 당시, (이후 외무장관 에렌탈 백작과 황제가 저지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이탈리아를 침략해 세속 왕국을 무너뜨리고 교황의 권위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인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의 성향이 헝가리인들에게 어떤 의심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군과 육군을 확대하느라 국고의 사정이 어려워진 것 또한 고인의 영향력이 발휘된 부분이다. 사적으로 그는 용감하고 호감형이었을지 모르나, 지인들은 그를 비이성적인 고집과 동시에 약하고 갈팡질팡하는 목표의식을 지녔던 인물로 알고 있다. 지금의 황제가 가진 강한 책임감을 그 후계자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황태자의 죽음 이후 새로 짜일 승계 구도가 복잡하고 불화로 가득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정을 도모하기에는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Economist)
**원문을 그대로 옮겼지만 1881년 암살당한 인물은 알렉산더 2세라 이코노미스트의 교정 실수가 의심되는 부분입니다. –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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