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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표범단과 북한, 그리고 미 제국주의

“(미국) 사회 안보에 가장 큰 위협”

캘리포니아에 근거지를 둔 극좌파 흑인 투쟁단체 흑표범단(Black Panthers)을 가리켜 당시 FBI의 후버(J. Edgar Hoover) 국장이 한 말입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여전히 횡행하던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표범단은 차별 받고 핍박 받는 흑인 지역사회를 백인 중심의 미 제국주의가 빚어낸 희생양이라고 보고, 직접적인 탄압을 일삼던 백인 경찰들을 향한 테러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습니다.

“깨진 와인잔, 주사기, 치킨 뼈까지 무엇이든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로 힘을 합쳐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자는 점, 그 근본적인 목표가 우리를 짓밟는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 어딘가 비슷한 집단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자는 주체 사상이 그렇고, 나라를 세운 뒤 어느덧 70년 가까이 줄곧 미제와 싸워왔던 북한이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쉽게 접점을 찾을 수 없는 흑표범단과 북한은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두 단체는 서로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북한 관련 뉴스 전문 매체인 엔케이 뉴스(NK News)에 글을 쓰는 벤자민 영(Benjamin Young)은 흑표범단과 북한의 협력이 단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이 모든 이야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를 아우르는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지만, 북한은 197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았습니다. 경제력의 우위를 앞세워 김일성은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명사를 초청하는 일이 잦았죠. 68혁명으로 인해 냉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자본주의 세계에 적지 않은 세대간, 문화적 균열이 생겨났고,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치던 미국의 젊은이들과 문화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 성공한 나라들은 하나의 대안처럼 여겨지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흑표범단과 북한의 밀회는 68혁명 시기의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와 구악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꼈던 젊은이들에게 수십조 원을 쏟아부어가며 전쟁에 집착하는 제국주의보다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가 훨씬 더 이성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북한은 불과 20여 년 전 한국전쟁 때 미군의 공습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됐던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흑백 인종차별 문제는 특히 미국에 국한된 문제이긴 했지만, 흑표범단은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입지를 넓혀가고자 했습니다. 당시까지 미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일절 맺지 않았던 알제리 정부가 흑표범단을 초청해 나라 대 나라 관계처럼 대사급 관계를 맺었고, 북한이 알제리에 신설된 흑표범단 대사관을 통해 당시 이 조직을 이끌던 엘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를 초청합니다. 엘드리지의 전 아내이자 흑표범단 운동을 함께한 동지였고, 지금은 예일대 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캐슬린 클리버(Kathleen Cleaver) 교수는 엘드리지가 북한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에 푹 빠졌다고 회상했습니다. 2년 후 두 부부는 북한을 다시 방문했고, 캐슬린은 북한에서 둘째 아이를 낳습니다. 출산을 준비하며 당시로서는 굉장히 뛰어났던 북한의 의료 체제를 접한 클리버 부부는 한 차례 더 감명을 받고, 엘드리지는 특히 일사불란한 북한 사회의 모습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주체 사상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물론 흑표범단의 행적을 살펴보면, 주체사상이나 북한의 체제가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문가들도 오히려 현실적으로 마오쩌둥 어록이나 프란츠 파농의 저작들이 흑표범단의 사상적 기반이 됐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이 겪은 북한 사회를 가리켜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 스위스 같다”고 극찬한 캐슬린의 경험도 북한 체제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연출한 만들어진 현실일 수도 있고요. 흑표범단과 북한의 관계는 클리버 부부가 흑표범단과 결별하면서 짧은 기억을 남기고 막을 내립니다. 당시의 결과로 남아있는 거라곤 북한에서 태어난 클리버 부부의 딸의 한국식 이름(김일성의 부인이 주체 조선에서 태어난 영웅적인 여성이라며 지어줬다는 ‘조주영희’)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엘드리지는 뒤에 보수주의자로 돌아섰고, 말년에는 자기가 직접 종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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