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영국 의회는 지난 2003년 이라크 침공의 배후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대화록을 비롯한 기밀 내용을 담은 이른바 칠콧 조사보고서를 펴낼 예정입니다. 세간에 알려진 의혹처럼 미국, 영국 정부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전쟁을 일으킨 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비난을 받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두 차례 전쟁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좋든 싫든 중동의 역내 질서는 크게 재편된 상태입니다. 특히 중동에서는 서로 다른 지점을 힘의 균형, 질서라고 여기는 세력들 사이에 합의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어 지엽적인 분쟁과 폭탄테러, 내전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라크 침공의 당사자 가운데 한 명인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21세기 분쟁의 근본 원인은 신념을 왜곡한 종교적 극단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옵서버(Observer) 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블레어 전 총리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주장, 의견, 신념을 퍼뜨리는 것이 더욱 쉬워진 21세기의 분쟁의 씨앗은 더 이상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지적하며, 이라크 침공을 결정할 때 독재자 후세인 축출, 민주주의 확산과 같이 지나치게 정치 체제의 변화만 주목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회고했습니다.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블레어 신앙재단(Tony Blair Faith Foundation)을 설립한 블레어 전 총리는 다른 신념을 용인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실제 21세기 첫 10년 동안 미국과 영국의 주도 하에 진행된 전쟁과 지역 분쟁 개입정책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구호가 허울 뿐이라는 지적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문제는 블레어 전 총리의 주장처럼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내고 이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거나 정책에 반영하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라크와 주변 지역의 종교, 인종, 문화 갈등의 실타래에 대해 미국, 영국 정부가 전혀 모르는 상태였을 리가 없지만, 그 문제를 앞세우기에는 전쟁의 명분이 부족했을 거라는 거죠. 종교적 극단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인류 보편의 가치인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특정 종교나 집단에 극단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을 객관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블레어 전 총리의 주장은 진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미 있는 첫 시도일 수도 있지만,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호한 수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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