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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페@스프] 사람들이 끌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름 결정론’ 따져보니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9월 24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이름이 곧 나의 운명일까?” 다소 비약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지만, 미국에서 한동안 진지한 학술 주제로 대접받은 질문입니다. 이름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 이른바 ‘이름 결정론(nominative determinism)’은 자기중심적 존재인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나와 관련된 것을 선호한다는 심리학 이론과 결합하면서 1990년대 심리학계에서 너도나도 들여다본 연구 주제였습니다.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에 정말 과학적인 근거가 있던 것일까요?

사실 한국인에게 이름 결정론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가 좋은 뜻이 담긴 한자, 또는 특별한 소망을 담은 순우리말 단어로 공들여 아기 이름을 짓고,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한 작명소가 여전히 성업 중인 사회니까요. ‘이름 따라간다’는 말은 우리 문화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오히려 화제 삼기가 새삼스러울 정도죠.

다만 9월 8일 자 뉴욕타임스 칼럼이 소개하고 있는 영미권의 이름 결정론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빼어나고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며 ‘수빈(秀彬)’이라는 이름을 짓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직업, 배우자, 거주지 등을 선택할 때 자기 이름과 비슷한 직업, 도시, 이름을 고르게 된다는 주장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던 시도에 관한 칼럼입니다.

전문 번역: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 논문까지 있다고? 더 흥미로운 질문은…

칼럼 내에서 언급된 예시들은 유치할 정도로 직관적입니다. 액체가 표면에 부딪히는 소리를 의미하는 ‘splat’과 발음이 같은 ‘스플랫Splatt’이라는 성을 가진 학자와, 소변을 뜻하는 구어 ‘wee’가 포함된 성을 가진 ‘위든Weedon’ 박사가 하필 비뇨기학을 전공해 요실금에 대한 논문을 함께 낸 것은 우연이라기에 너무 절묘하다는 거죠. 굳이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예를 찾자면, 한때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양사 박양념 선생님’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이 이끄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세상에 물론 없지 않겠지만, 이름 결정론에는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특정한 직업을 선택하고 특정 이름을 가진 배우자를 선택한 데는 ‘내 이름과 비슷한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라는 설명보다 특정 이름의 시대적 유행이나 민족 내 결혼과 같은 더 단순하고 합리적인 설명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위든’ 박사가 비뇨기학을 전공하게 된 것, ‘박양념’ 선생님이 영양사가 된 것은 아쉽게도(?) 그저 절묘한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해당 칼럼은 이름 결정론이 인기를 얻게 된 배경과 뒤이은 학술적 반박이 어떤 내용이었는지까지 자세히 소개하면서, 다만 이름과 운명 간 관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통제와 질서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해석합니다.

 

과학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끌리는 이유

삶이 이름을 따라 흘러간다는 말에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할지라도 사람의 이름은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름이 다소 특이해서 평생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남들보다 더 주목을 받아본 분들에게는 곧장 와닿는 이야기겠죠.

미국과 같은 다민족·다문화 국가에서는 인종을 특정하기 쉬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는 구조적인 문제도 존재합니다. 칼럼 중간에 링크로 짧게 소개된 연구는 ‘라키샤’, ‘자말’처럼 “흑인들이 많이 쓰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채용 과정에서 차별받는다는 결론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독일과 프랑스, 스웨덴과 네덜란드 등에서도 채용 과정에서 성별과 인종 정보를 알지 못하도록 이름을 가리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2019년 NPR은 ‘마리화나 펩시’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 교실과 흑인 이름: 교사의 행동과 학생의 인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보도했는데, 이 논문도 “명백한 흑인 이름”이 학생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리화나 펩시 박사의 삶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이름 결정론의 정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미국에서 이름이 어떻게 나이와 거주지, 정치적 성향과 직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분석한 2015년 워싱턴포스트 기사도 흥미롭습니다. 이름 결정론의 매력에 사로잡혀 지나친 비약이나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름은 분명 누군가의 뿌리, 부모의 소망, 모두의 선입견, 시대의 변화, 유행 등 인간과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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