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3월 4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전쟁과 평화를 관장하던 신 야누스의 신전에 얽힌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전 문이 열려 있으면 로마가 전쟁 중이라는 뜻이고, 문이 닫혀 있으면 로마 전역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라는 뜻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긴 로마 시대를 통틀어 야누스 신전 문이 닫혀 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오늘날 야누스의 신전이 있다면, 그리고 그 대상을 지구촌 전체로 넓힌다면, 근·현대사 내내 신전의 문은 단 한순간도 닫지 못했을 겁니다. 문을 닫을 일이 없으니, 아예 문을 떼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2년 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유럽에서 또다시 발발한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지난해 10월에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뒤 이스라엘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가자 지구가 다시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됐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모든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면, 가장 약한 민간인, 어린이, 여성의 목숨부터 위험해지며 힘없이 스러지기 마련인 전쟁은 문명의 발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알고도 막을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굳이 전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끔찍한 일은 매일,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제가 사는 미국만 해도 총기 소유가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이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끔찍한 총기 사고들이 그야말로 쉼 없이 일어납니다. 총기 폭력에 관한 통계 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들어 벌써 미국에서 총기로 숨진 사람이 2,500명이 넘습니다. 매일 40명 넘는 사람이 총기로 숨진 셈입니다. 여기에 오피오이드 중독이나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너무 많아서 선진국으로선 이례적으로 최근 평균 기대수명이 2년 연속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대수명 감소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코로나19 감염자, 사망자가 유독 많았던 것도 미국의 의료 접근성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나빠서 나타난 결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의 앤 케이스, 앵거스 디튼 교수는 약물 중독으로 인한 과다복용,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질환과 자살을 묶어서 “절망의 죽음(death of despair)”이라고 불렀습니다. 절망의 죽음은 케이스, 디튼 교수가 미국인의 사망 원인을 정리한 데이터를 연구하다 발견해 만들어 낸 말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너무 높은 자살률 때문입니다. 특히 젊은 층의 자살률은 최근 들어 급격히 높아져 한국의 10, 20, 30대 사망 원인 1위가 모두 자살이 됐습니다. 희망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절망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이 통계에 보이는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인류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어쩌면 끔찍한 재앙들을 옆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문제를 정확히 인식한 다음 원인을 분석하고 규명해야 할 텐데, 오히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전황도, 가자 지구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전쟁 발발 초기에 비하면 들려오는 빈도가 자꾸 줄어듭니다. 마치 자극에 반응하는 역치가 높아진 것처럼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투나 수많은 민간인이 위험에 처했다는 뉴스가 아니면 “새로울 게 없다”는 이유로 소식이 들리지도 않습니다.
미국의 총기 사고나 한국의 자살률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위에서 소개한 미국 총기 사고 통계 사이트는 총기 사고로 인한 사상자가 확인될 때마다 시시각각 업데이트됩니다. 그러나 총기를 이용해 자살로 사망하는 사례나 한두 명 다치는 사고는 보통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습니다. 한국도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아든 지 하도 오래돼서 그런지 더는 이 암울한 소식이 주요 뉴스에 들지도 못합니다. 그런 충격적인 소식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오히려 새삼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어쩌다 우리는 이토록 끔찍한 상황에 둔감해진 걸까요? 신경과학자 탈리 샤롯과 “넛지”를 쓴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이 우리 뇌가 작동하는 원리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기했습니다.
전문 번역: 사람들은 왜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에 둔감한 걸까?
샤롯과 선스타인은 익숙해지는 기제를 원인으로 꼽습니다. 습관처럼 익숙해져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습관화(habituation)란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 뇌는 수많은 자극에 반응하고 이를 정보로 처리한 뒤 대응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모든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고 대응하면 처리 용량을 초과해 버릴 겁니다. 그래서 우리 뇌는 대응이 필요한 자극에 먼저 반응하도록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에 따라 정보를 처리합니다. 주변의 위험을 감지하는 것처럼 생존에 직결될 만한 자극에 먼저 반응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떤 자극이 위험한지 아닌지 늦지 않게 파악해 판단하려면 새로운 자극에 먼저 반응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에는 그래서 뇌가 특별히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습관화 기제는 이해할 만합니다. 인류의 뇌가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발달한 결과일 겁니다. 그런데 익숙해지지 말아야 할 대상에도 익숙해지다 보니 문제가 됩니다. 습관화의 과유불급이라 할까요? 익숙해지지 말아야 하는 일에도 자꾸 익숙해져서 문제를 간과하고 마는 겁니다. 글머리에 예로 든 끔찍한 전쟁과 사람 목숨이 달린 안타까운 사고들, 특히 막을 수 있는 사고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도 ‘이 문제가 뭐 하루이틀도 아닌데,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라고 생각한다면 습관화가 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제도를 개선해 마련할 수 있겠지만, 그전에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인식하는 데는 개개인의 몫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칼럼을 쓴 샤롯과 선스타인은 “익숙해지기를 거부하는 기업가(dishabituation entrepreneurs)”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예로 든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지적한 데서 시작해 운동을 이끌고 변화를 만들어 낸 선각자이자 선구자들입니다. 사회의 수많은 차별과 부조리에 맞설 수 있던 건 차별과 부조리가 잘못됐다고 인식할 수 있도록 논의의 물꼬를 터준 이들 덕분입니다. 이들이 익숙한 것 너머로 시선을 돌리고, 문제를 지적해 준 덕분에 우리는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익숙해지기를 거부하는 기업가”라는 게 꼭 거창한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는 사람만 칭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칼럼에서 샤롯과 선스타인도 가족이나 이웃, 직장 동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썼죠. 생각해 보면,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와는 학교를 같이 다녔고 어쩌다 보니 군생활도 같이 했습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병영생활의 부조리를 겪었을 겁니다. 특히 계급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는데, 다양한 이유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계속해서 문제로 두는 쪽을 택합니다. 문제에 눈을 감고 지나가는 거죠. 내가 이등병, 일등병일 때만 잘 견디면 내가 고참이 되고 나면 불편할 일 없으니 그때부턴 나 몰라라 하면 그만입니다.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선다고 빨리 전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힘 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죠.
그런데 앞서 말한 제 친구는 소대와 내무반에서 선임이 되고 나서, 즉 부조리를 해소하진 못하더라도 줄일 수 있는 위치에 오르고 난 뒤에 하나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이등병 때 느끼고 다짐했던 걸 잊지 않고 실행에 옮긴 겁니다. 어찌 보면 관등성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과도한 얼차려를 주지 말자고 동료 고참들을 설득하는 일처럼 커다란 부조리라고 하기는 어려운, 꽤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일은 전혀 아니었죠. 그러나 적어도 제게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칼럼을 읽고 나자 ‘내 주변의 소소한 위인’으로 이 친구가 떠오를 만큼 인상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칼럼에는 나치 치하의 한 독일인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소개됐죠. 매일, 매번 아주 조금씩 나빠지는 걸 방관하고 묵인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요? 누구나 너무 익숙해지는 것을 거부하고, 잘못된 것을 보면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 부조리라는 것이 꼭 거악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에 아주 조금씩 좋아지고 무언가 나아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나쁜 걸음이 쌓여 재앙이 된다면, 반대로 좋은 걸음과 개선이 거듭 쌓이면 희망을 떠받치는 단단한 토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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