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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페@스프] ‘이 동네 지소연 언니’나 ‘저 동네 연경쌤’이 많아져야 해!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4월 10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2018년 가을,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일정을 다 마치고, 오후 한나절 시간이 났습니다. 축구의 성지 웸블리 구장에 가볼 기회가 생긴 겁니다.

웸블리 경기장은 다목적 복합 경기장으로, 주로 축구 경기가 열리는데,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이 홈구장으로 쓰는 유서 깊은 경기장입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이 웸블리에서 열렸고, 축구 외에 럭비 경기나 콘서트가 열리기도 합니다. 웸블리에서 열린 가장 유명한 콘서트는 1985년 생방송으로 진행한 자선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일 겁니다. 록밴드 퀸이 전설적인 무대를 선보인 이야기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제작돼 많은 인기를 끌기도 했죠.

축구팬인 저는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탔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뛰는 토트넘 구단은 원래 홈구장을 보수 공사하고 있어서 임시로 웸블리 구장을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혹시 웸블리에 가면 손흥민 선수 유니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죠. 국가대표팀 구장인 만큼 토트넘 관련 상품은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하는 저를 보더니, 웸블리 구장 직원이 잠시 뒤 시작하는 경기장 투어에 참가하면, 선수들이 사용하는 라커룸에 가볼 수 있는데, 거기에 토트넘 선수들의 유니폼이 걸려 있을 거라고 얘기해줬습니다. 사진이라도 찍으라면서 말이죠.

투어는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습니다. 잔디는 엄격한 관리 대상이라 밟아볼 수 없었지만, 탁 트인 구장을 보는 것도, 라커룸에서 손흥민 선수 유니폼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던 것도 좋았습니다. 웸블리 경기장에서 워낙 축구사에 중요한 경기가 많이 열렸던 터라 관련 기록과 영상, 기념품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죠. 작은 박물관처럼 전시해 둔 웸블리 구장의 역사적인 기록을 쭉 살펴보는데, 갑자기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몰라봐서 미안했던 또 다른 레전드, 지소연

바로 첼시 여자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지소연 선수의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는 당시 첼시의 주장이던 케이티 챕만 선수의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FA컵 결승전에서 뛰는 것, 웸블리에서 뛰어보는 건 모든 선수들의 꿈이다. 오늘은 그 꿈이 이뤄진 날이다.”

런던을 연고로 하는 팀들이 가끔씩 빌려 쓰긴 하지만, 웸블리의 주인은 잉글랜드 국민이고, 그래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만 홈구장으로 씁니다. 대신 프로와 아마추어를 망라한 모든 클럽이 참여하는 FA컵 결승전이 매년 시즌 막바지인 5월에 웸블리에서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왜 그 많은 결승전 가운데 첼시팀의, 그것도 지소연 선수의 경기 장면이 사진으로 걸려있던 걸까요? 사진 아래 설명을 보니, 다음과 같이 써 있었습니다.

“2015년부터 웸블리에서는 여자축구 FA컵 결승전도 열린다. 사진은 처음으로 웸블리에서 열린 여자 FA컵 결승전 경기 장면.”

2014년 첼시로 이적한 지소연 선수는 첫 시즌부터 팀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했습니다. 역사적인 웸블리에서 열린 첫 FA컵 결승전에서 지소연 선수는 첼시가 노츠 카운티를 1:0으로 꺾는 결승 골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웸블리 박물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거죠.

지소연 선수한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클럽팀이나 국가대표팀 관련 소식을 줄줄 외우고 열정적으로 응원하긴 하는데, 그 대상이 남자축구에만 한정돼 있었으니까요. 첼시라는 명문 구단에서 이미 구단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반열에 오를 만큼 엄청난 활약을 펼치던 지소연 선수의 존재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지소연 선수는 첼시에서 무려 8시즌 동안 활약한 뒤 지난해 국내 리그로 돌아와 오는 7월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문번역: 위대한 여성 선수들이 마땅한 대접을 받았더라면

 

그런데 지난 3일, 뉴욕타임스 오피니언란에 왜 여성 스포츠 선수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는가 고찰한 칼럼이 실렸습니다. 손흥민 선수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도 저 같은 축구팬의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받던 지소연 선수 이야기와 맥락이 닿는 글이었습니다.

칼럼을 쓴 케이트 페이건은 남성 스포츠에 비해 여성 스포츠가 인기를 끌지 못하는 원인으로 이야기의 부재를 꼽았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소비되는 프로 스포츠의 경우 인기 만큼 중요한 게 더 많은 팬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여성 스포츠에는 바로 그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사실 이야기 부족과 인기 저하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이기도 합니다. 인기가 없다 보니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기도 하고, 이야기가 안 나오니 팬과 언론의 관심도 끌지 못해 결국 인기가 좀처럼 오르지 않기도 하니 말이죠. 어쨌든 페이건은 여성 스포츠가 남성 스포츠에서 오랫동안 만들어 온 선순환 구조, 모멘텀을 좀처럼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 하며, 이는 미국 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20세기에 무려 50년 동안 여자축구를 사실상 금지했던 영국 축구협회에 관해서도 언급했죠.

 

한국 여자배구는 반례가 될 수 있을까?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 저는 뉴욕에서 6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안 보면 후회할 것 같은 스포츠 경기가 있어서였습니다. 바로 한국 여자배구 챔피언 결정전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국가대표 주장 박정아 선수가 있는 도로공사가 배구 황제 김연경 선수가 버틴 흥국생명을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죠. 사실 제가 응원하는 팀은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결승전은 경기 결과와 하이라이트만 보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될 것 같아 여자배구 팬으로서 5차전은 꼭 보기로 마음먹고 눈을 떴습니다. 경기를 보신 분이라면 동의하시겠지만, 새벽같이 일어나서 생중계로 본 게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케이트 페이건은 칼럼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빨리 달리고, 더 높이 뛰기 때문에 남성 스포츠가 더 인기가 많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일축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사람들이 어린이 야구대회인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 열광하는 걸 반례로 들죠. 한국에서는 지난 몇 년간 여자배구가 남자배구를 인기와 이야기에서 모두 앞질렀습니다. 도쿄올림픽에서 보여준 김연경 선수의 ‘라스트 댄스’에 국가대표팀의 감동적인 경기력이 리그 흥행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고, 김연경 선수가 국내 무대에 복귀한 덕분에 나타난 일시적인 열풍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 남자배구 팀들이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학교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 가담한 혐의를 받은 선수들에 대한 징계에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팬들이 등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여자배구는 올 시즌에도 인기와 이야기에서 끝까지 남자배구보다 실적이 나았습니다. 페이건이 말한 것처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나오면서 인기도 더 많아지고 전설이 나오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팬들이 김연경 선수를 칭할 때 ‘배구 여제’라는 표현 대신 ‘배구 황제’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는데, 이는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스포츠의 부수적인 종목으로서 여성 스포츠가 아니라 인기, 흥행, 수익, 팬층 확대 등 프로 스포츠 종목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스스로 다 갖춘 여자배구로 거듭나려면 작은 표현부터 다듬을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롤모델이 더 많아졌으면

페이건은 미국 스포츠, 그 중에도 주로 농구를 예로 들며 쓴 칼럼에서 여성 스포츠에 이야기가 없는 점을 아쉬워했습니다. 한국 스포츠에 관해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건 특히 여자 어린이와 청소년이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자 선수들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뽐내는 엘리트 선수들이야 종목마다 넓지 않은 저변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많이 나오는 편이죠. 제가 말하는 롤모델이란 주변에서 직접 지도받을 수 있는 코치들입니다.

뉴욕 사는 미국인 친구가 초등학생 딸아이를 겨울방학 때 농구 캠프에 보냈는데, 첫 날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코치 선생님이 남자여서 농구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별이나 인종이 자신과 같은 대상을 롤모델로서 먼저 찾는 시기를 누구나 거칩니다. 친구의 아이는 아마도 그 단계를 지나고 있는지, 모든 스포츠도 여성 스포츠만 보고 응원하겠다고 비장하게 선언까지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다음날은 여자 코치가 지도하러 왔고, 이후 친구의 아이는 농구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떤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린이들이 건강도 챙기고 협동심도 체득할 수 있는 스포츠의 순기능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자 어린이, 청소년들이 운동을 많이 안 하는데, 그건 TV 속 스포츠 스타 말고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롤모델이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스포츠 강국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따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들이 누구나 취미로 하는 운동 종목이 하나씩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많은 것이 그렇듯, 운동도 습관입니다. 어릴 때 습관을 잘 들여놓으면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죠.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어떤 종목이든 운동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운동은 뭐든 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으면, 그리고 문턱이 낮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지소연, 김연경 같은 슈퍼스타 못지 않게 “우리동네 지소연 코치 언니”, “00동 연경쌤” 같은 롤모델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ingppoo

뉴스페퍼민트에서 주로 세계, 스포츠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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