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부터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3월 1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재난 영화를 보면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치명률이 높은 무서운 전염병이든, 지진해일이든, 운석이 지구에 떨어지는 일이든, 재앙이 올 거라고 부지런히 경고하고 다니는 인물입니다. 주로 과학자가 이 역할을 맡는데, 영화 속에서는 보통 과학자의 경고가 무시되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죠. 공식과도 같은 복선에 따라 재난이 실제로 닥치고 나면 영화 속 세상 사람들은 그제야 부랴부랴 선견지명을 보였던 이를 찾곤 합니다.
지난주 미국에서는 자산 규모 16위인 실리콘밸리은행(Silicon Valley Bank, SVB)과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뉴욕에서 빠르게 성장하던 지방은행 시그니처 은행(Signature Bank)이 이틀 간격을 두고 파산관리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극적인 재난은 아니었지만, 미국 금융시장 전체를 얼어붙게 할 만한 소식에 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다행히 정부가 재빨리 개입해 고객이 맡긴 예금은 전부 보장해주겠다고 발표하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이번 사태의 원인을 둘러싸고 많은 분석과 논의가 쏟아졌습니다.
금융 규제나 금융 부문 소비자 보호에 관해 재난영화에 나오는 과학자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인물이 바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입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로스쿨에서 파산법과 서민 금융 제도를 연구하고 가르친 워런은 소비자금융보호국의 특별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2012년엔 본인이 교수로 재직하던 하버드대학교가 있는 매사추세츠주 상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습니다. 2020년엔 민주당 대선 경선에 뛰어들어 한때 여론조사 지지율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바이든에게 졌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금융 규제가 하나둘씩 제거되고 느슨해질 때마다 “이러다간 정말 큰 일 난다”고 경고해 온 워런 의원이기에 멀쩡해 보이던 은행이 갑자기 두 곳이나 돈이 모자라 문을 닫자, 사람들은 부랴부랴 워런 의원이 했던 말들을 되새겨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워런 의원이 직접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썼습니다. 과거 발언을 찾아보는 수고를 덜어준 건 고마운데, 마치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고 짐짓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선 칼럼을 번역했습니다.
전문 번역: SVB가 망했다. 우리는 누구 책임인지 잘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이 경고한 일이 그대로 일어난 지금은 아마도 워런 의원의 발언권이 가장 센 시점일 겁니다. 그러나 꼭 시점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2008년의 끔찍한 위기를 겪은 뒤 마련해 둔 안전장치를 위험 요소가 여전히 있는데 마구 철회하는 건 무모한 일이라는 그의 경고는 논리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물론 중간에 대기업과 대형 금융기관을 악마화하는 뉘앙스의 표현이 거슬리는 독자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모든 규제를 악마화하는 언론에서 워런 의원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나 제가 만나 본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워런 의원을 두고 한 평가와 표현에 비하면 오히려 점잖아 보였습니다.
무력화된 규제 때문에 불거진 취약점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 은행이 구체적으로 자산 운용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관한 설명은 사실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많이 접하셨을 겁니다. 스프에도 글이 있고, SBS 뉴스에서도 자세히 다뤘습니다. 여기서는 워런 의원이 지적한 대로 그 잘못된 자산 운용, 경영을 규제로 막을 수 있었는지 짚어보겠습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주요 고객은 은행 이름에도 나오듯 대부분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이었습니다. 내로라하는 테크 스타트업이 즐비한 실리콘밸리의 경기는 코로나19 팬데믹 내내 제조업이나 유통 등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실적 좋은 기업 고객이 많은 실리콘밸리은행에도 예금이 급증하죠. 보통 은행은 예금에 지급하는 이자와 돈을 빌려주고 받는 대출 이자를 달리 정해놓습니다.
이 예대마진이 은행의 중요한 수입원이죠. 그런데 경기가 좋을 때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은 회사를 꾸리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이유가 거의 없었습니다. 잘나가는 기업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으니까요. 그래서 예금 이자보다 더 높은 이자를 받고 대출해줄 데가 마땅치 않던 실리콘밸리은행은 예금으로 받은 돈 대부분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에 투자합니다. 정부가 발행한 국채나 정부가 보증하는 장기 채권을 산 거죠.
그런데 국채나 장기 채권에 투자했다는 건 오랫동안 저금리가 유지될 거라는 데 베팅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금리가 오르기라도 하면 채권 가격이 내려갈 테니까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겠지만, 꼭 그럴 때 설마가 사람을 잡죠.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연준은 금리를 빠르게 올렸습니다. 실리콘밸리 경기도 덩달아 식으면서 투자자를 찾기 어려워진 기업들은 은행에 맡긴 예금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은행은 그 많은 돈으로 국채나 한참 있어야 만기가 오는 채권을 사둔 바람에 예금을 찾으러 온 고객에게 꺼내 줄 돈이 없던 겁니다.
워런 의원이 규제 완화 때문에 초래한 문제라고 지적한 게 바로 이겁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이번 사태와 달랐지만, 이때 문제로 지적된 것 중 하나가 은행들이 돈을 너무 안 쌓아놓고 거래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드프랭크법은 은행과 대형 금융기관이 어느 정도 이상 자본을 쌓아놓고 거래해야 하고, 필요할 때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유동성도 갖추어야 한다고 명시해뒀습니다. 법에 따라 주기적으로 스트레스 테스트를 해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각종 제재가 뒤따랐습니다.
금융위기 직후에는 여론에 밀려 규제를 받아들였던 은행들이 이후 조금씩 규제를 무력화했고, 그 정점이 바로 지난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규제 완화법이었습니다. 도드프랭크법에 따라 엄격한 규제를 받는 금융 기관의 기준이 자산 규모 100억 달러에서 2,500억 달러로 높아졌습니다.
(자산 규모가 2,500억 달러에 미치지 못하던)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 은행은 마침내 규제에서 벗어나게 됐죠. 만약 규제가 풀리지 않았다면, 기업 고객이 맡긴 돈 가운데 일부는 채권을 사는 대신 은행이 보유하고 있었을 테고, 뱅크런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연방예금보험공사의 보장 한도 25만 달러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제공하는 예금보험제도에 따르면, 고객이 은행에 맡긴 돈 25만 달러까지는 은행이 파산해도 보전해줍니다. 25만 달러면 3억 원이 넘는 액수인데, 개인이 이만한 돈을 저축하고 있기는 쉽지 않죠.
그런데 기업 고객의 경우 이야기가 다릅니다. 기업 고객에게 25만 달러는 그렇게 큰 액수가 아니죠. 대부분 고객이 기업 고객이던 실리콘밸리은행은 자연히 예금액이 25만 달러가 훌쩍 넘는 고객이 많았습니다. 예금으로 받은 고객 돈 가운데 예금보험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돈의 비중이 높았죠. (시그니처 은행은 이 비중이 심지어 더 높았습니다.)
도드프랭크법에 따른 스트레스 테스트 중에는 25만 달러 넘는 규모의 예금을 많이 받을 경우 추가로 지급 준비율을 높이거나 유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 은행은 ‘대형 은행이 아니므로’ 규제 대상에서 빠졌고, 그 결과 위기가 닥치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예금보험공사의 기금을 통해 우선 예금액을 보전해주고, 궁극적으로는 두 은행의 자산으로 이를 다시 채워 넣겠다고 밝혔는데, 정말 그렇게 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워런 의원의 말대로 지켜봐야 합니다.
워런 의원이 칼럼에서 지적한 파산한 은행 경영진의 상여금 잔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미국의 경영진과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가 극심한 소득불평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긴 한데, 이 주제는 언젠가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겁니다.
빛바랜 실리콘밸리, 규제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영원한 호황이 이어질 것 같던 실리콘밸리 경기는 지난해 이름만 들어도 아는 테크 대기업들이 10만 명 넘는 인력을 해고한 이후 부침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제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은행마저 갑자기 망해버리면서 아메리칸드림과 미래를 이끌어갈 혁신의 보루처럼 보이던 실리콘밸리를 둘러싼 환상은 분명 빛이 바랬습니다.
물론 이번 일로 실리콘밸리가 혁신과 성장의 동력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번 일이 실리콘밸리와 테크 기업들이 정부의 규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비뚤어진 의견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서비스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CEO 샘 알트만이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 소식을 듣고 남긴 트윗을 보고 한 생각입니다.
알트만은 거래은행의 파산으로 갑자기 임금을 지불하거나 필요한 대금을 못 치르게 된 스타트업을 걱정하는 투자자들에게 “오늘은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급하게 융통해야 할 데 쓸 수 있도록 당신이 투자한 회사에 지원금을 보내주기 좋은 날”이라고 썼습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돈을 보내라는 말치고는 이상하지 않게 들리는 말이긴 합니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했으니, 이해도 됩니다.
다만 알트만도 그렇고 왜 실리콘밸리에서는, 또 금융권에서는 규제의 필요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걸까요? 멀쩡히 잘 작동하던 규제만 없애지 않았더라도 이 사달을 피할 수 있었던 게 명확해 보이는데, 지금 업계에서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알트만이 그 점을 언급해줬다면 어땠을까요? 워런 의원의 말은 사실 규제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기 때문에 더 아쉽습니다.
모든 규제가 시장 경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물론 그런 규제도 있겠죠. 하지만 좋은 규제, 필요한 규제는 오히려 무법천지가 될 경우 피해를 볼 시장의 약자를 보호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장 경제를 잘 굴러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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