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부터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글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12월 12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미국 대법원은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관입니다. 한국의 대법원과는 기능과 역할이 다르므로 한국의 사법 제도를 곧바로 대입해 바라보면 오히려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관이기도 합니다.
미국 대법원의 권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건 바로 미국 헌법을 최종적으로 해석하는 일입니다. 미국 최상위법인 헌법을 시대에 맞게 해석, 적용하는 권한은 오직 대법원만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법 전통을 따르는 미국에서는 법원 판례가 곧 법에 준하는 효력을 지닙니다. 그래서 미국 대법원의 판례는 헌법에 준하는 효력을 지닙니다.
미국 헌법은 본문 7개 조항과 수정문 27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건 등을 담은 본문보다 실질적인 내용의 중요성은 수정헌법이 더 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수정헌법은 미국 법체계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 중요한 수정헌법 제1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흔히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알려진 조항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헌법 치고는 조문이 짧고 간략하죠. 시대에 따라 또 환경, 맥락, 상황에 따라 조금씩 또는 크게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 여지를 채우는 일, 즉 헌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진 대법원이 중요한 겁니다.
미국 대법원은 한 해에 보통 70~80건의 판결을 하는데, 여름 휴지기 전인 6월 말, 7월 초에 대부분 판결이 나옵니다. 이 때가 대법원 관련 뉴스가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입니다. 여름이 아닐 때 나오는 대법원 관련 뉴스는 열에 아홉 구두 변론을 듣고 쓴 기사들입니다. 오늘 소개한 칼럼도 지난 5일 대법원에서 열린 한 사건의 구두 변론에 관한 글입니다.
전문 번역: 수정헌법 1조에 관해 잘못된 질문을 던지려 하는 대법원
종교적 신념이냐 소수자 보호냐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콜로라도주 차별금지법이 개인의 신념을 지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느냐입니다. 과거형 ‘억압했느냐’가 아니라 ‘억압하느냐’라고 쓴 데 주목해 주세요. 글 뒤에 그렇게 쓴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쟁점부터 좀 더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웹 디자이너 로리 스미스(Lorie Smith) 씨는 303 크리에이티브(303 Creative)라는 온라인 마케팅 회사를 차려 일합니다. 303 크리에이티브는 결혼을 앞둔 커플을 위해 결혼식 웹사이트를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출시하려 합니다. 누구나 돈을 내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이 서비스를 출시하려면 콜로라도주 공공시설법(public-accommodations law) 상의 차별금지 조항을 따라야 합니다. (콜로라도주뿐 아니라 미국 모든 주에 비슷한 차별금지법이 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업체는 인종, 종교, 성별은 물론 성적 지향을 두고도 고객을 차별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스미스 씨는 동성 결혼에 반대합니다. 2015년에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고, 이제는 미국인 가운데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이들이 70%를 넘었지만, 스미스 씨는 무릇 결혼이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어야만 한다고 믿는 30%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결혼식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을 하려다 보니 문제가 생깁니다. 콜로라도주 차별금지법 때문입니다.
동성 커플이 결혼식 웹사이트 제작을 의뢰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죠. 스미스 씨는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자기 신념을 거스르며 억지로 주문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동성 결혼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의뢰를 거절하면 이는 성소수자 차별이 되고, 곧 차별금지법 위반이 되니까요. 스미스 씨는 이를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콜로라도주 법무부는 이에 차별금지법이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취지에 맞게 적용되고 있을 뿐 스미스 씨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종교적 신념을 억압하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
데자뷔? 동성 커플 결혼 케이크 둘러싼 공방
대법원판결은 그 전까지 나온 모든 판결보다 우선합니다. 이를 두고 대법원판결이 기존 판례들을 덮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2015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대법원판결도 그랬습니다. 이전까지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주도 있었고, 법으로 금지한 주도 있었으며, 예외적인 상황을 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면서 모든 판례가 덮였습니다. 이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진영에서 이를 되돌리는 방법은 새로운 대법원판결을 끌어내는 것뿐이었습니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따라 50년 가까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로 인정돼 온 여성의 임신중절권이 올해 6월 돕스(Dobbs) 판결로 무효가 된 것처럼 말이죠. 2015년 대법원판결 이후 보수 단체들은 곧바로 이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보수 단체가 처음으로 결과를 낸 판결이 바로 2018년 마스터피스 케이크숍(Masterpiece Cakeshop) 대 콜로라도 민권위원회(Colorado Civil Rights Commission) 판결입니다. 잭 필립스라는 케이크 제빵사가 동성 커플의 결혼식 케이크 주문을 거절하자 동성 커플이 차별금지법 위반이라며 제빵사를 고소한 사건입니다. 당시 대법원은 7:2로 마스터피스 케이크숍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다만 대법원은 종교적 신념 대 차별금지법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콜로라도주 정부가 차별금지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필립스를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다룬 데 초점을 맞췄다는 해석이 많았습니다. 결국, 필립스는 승소했지만, 동성 커플을 위해 결혼식 케이크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필립스의 표현의 자유나 종교적 신념을 침해하고 억압하는지, 즉 핵심 쟁점에 관한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5년 전 마스터피스 케이크숍과 제빵사 필립스를 변호했던 자유수호연맹(Alliance Defending Freedom)이라는 단체가 이번에도 303 크리에이티브와 로리 스미스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303 크리에이티브는 실제로 마스터피스 케이크숍에서 10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웃 동네에 있는 가게입니다. 자유수호연맹은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완벽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차별금지법이 적용되는 범위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거죠. 차별금지법 자체를 철폐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차별금지법을 피해 갈 수 있는 예외를 늘리기만 해도 보수 단체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셈입니다.
쟁점 톺아보기
양쪽의 주장을 각각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 먼저 로리 스미스 씨는 동성 커플의 결혼식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데 자연스레 포함되는 메시지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서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동물 애호가인데, 유기견 보호센터를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라면 의뢰 고객이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상관없이 자신은 기꺼이 일을 맡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결혼식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건 자연히 그 결혼을 축하하고 축복하는 암묵적인 표현이기도 한데, 자신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도저히 동성 커플의 결혼을 축하할 수 없다고 스미스 씨는 설명합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 때문에 웹사이트 제작 주문을 거절하지 못하고 억지로 원치 않는 일을 맡으면 이는 수정헌법 1조 위반이라는 겁니다.
콜로라도주는 공공시설법의 차별금지 조항이 스미스 씨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데 변론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공공시설법은 대중을 상대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파는 업체가 고객을 가려 받을 경우 차별의 소지가 있기에 이를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제품이나 서비스에 담긴 메시지와 표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규제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303 크리에이티브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메시지 때문에 사업을 출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 결국, 고객을 가려 받겠다는 속셈에서 비롯된 주장일 뿐이고, 이는 명백한 차별이라는 겁니다.
6:3 보수 우위 대법원의 예견된 행보
현재 미국 대법관 9명 가운데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대법관이 6명이나 됩니다. 6:3이라는 보수 우위 구도가 확립된 뒤 대법원은 지난 여름 50년 가까이 인정되던 임신중절권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에서 삭제했고, 100년 넘게 유지해 온 뉴욕주의 총기 규제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며, 종교와 국가를 분리한다는 세속주의 원칙도 점점 허물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보수 우위 대법원은 303 크리에이티브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9명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클래런스 토마스, 사무엘 앨리토 대법관이 논의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다음번 타깃은 동성 결혼이 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번 판결로 동성 결혼이 곧바로 불법이 되지는 않겠지만, 303 크리에이티브가 승소하면 표현의 자유는 영역을 한껏 넓히고, 성소수자의 권리는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앞서 구두 변론의 쟁점이 왜 과거형 ‘억압했느냐’가 아니라 ‘억압하느냐’였는지 설명하겠다고 했었죠. 그 설명만 덧붙이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정확히 5년 전 2017년 12월 5일 있었던 마스터피스 케이크숍 사건과 이번 사건의 중요한 차이도 바로 이겁니다. 당시 제빵사 필립스 씨는 동성 커플이 결혼 케이크를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는데 이를 거절했고, 이후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로리 스미스 씨는 실제로 결혼 웹사이트를 만들어 판매한 적이 없습니다. 철저히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 다음 차별금지법 때문에 내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할 것으로 보인다며 선제적으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구두 변론에 참여한 대법관들의 질문도 실제로 원고, 피고가 어떤 행동을 왜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럴 만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으니까요. 대신 수많은 가정에 기댄 질문이 난무했습니다. 원래 대법관들은 다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이럴 때도 주장하는 바가 타당한지 논리적으로 증명해보라고 요구하곤 하지만, 이번 구두 변론은 온통 가정법만 가득했다는 점에서 특이했습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하급법원이나 주 대법원이 판결한 모든 사건을 다시 검토하는 곳이 아닙니다. 대법관들은 어떤 사건을 통해 헌법을 어떻게 다시 해석하려 할지를 처음부터 고려해 상고를 받아들입니다. 매년 대법원에 올라오는 상고 청구서만 7천 건이 넘습니다. 이 가운데 대법원은 70~80건만 판결하니까 1% 정도만 선택받는 셈입니다. 6:3의 압도적인 보수 우위 구도가 유지되는 한 미국 대법원은 지금처럼 보수 대법관들 눈에 잘못된 판례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을 골라서 판결을 내릴 겁니다.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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