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분석한 지난 글 “미국 중간선거, ‘붉은 파도’는 없었지만”에서 설명했듯이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예상과 달리 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유권자들이 트럼프가 연상되는 투표용지를 받은 주에서는 민주당이 대체로 선전했다는 ‘투표용지 효과’에 관해서도 살펴봤죠. 그러나 트럼프는 자신을 향한 책임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15일 밤 2024년 대선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수선했던 출범식보다 더 큰 문제는
이날 트럼프의 연설은 여러모로 어수선했습니다. 트럼프는 중간선거 패배의 책임론을 애써 일축했지만, 어딘가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보였습니다. 지지자들의 에너지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게 연설할 때도 시종일관 청중을 휘어잡으며, 이른바 ‘밀당’을 잘하는 연설가로 알려져 있죠. 그러나 이날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횡설수설이 이어졌고, 청중들이 자리를 뜨려 하다가 경호원의 제지를 받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방송사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보수 언론들도 트럼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공화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트럼프 카드로 과연 대선에서 다시 승리할 수 있을지 일제히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트럼프의 마이크 역할을 했던 폭스뉴스는 이날 트럼프의 연설이 지루하게 늘어지자, 아예 생방송을 끊고 다른 뉴스를 이어갔습니다. 이래저래 트럼프로서는 불안한 출범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트럼프가 가장 걱정해야 하는 문제는 정체된 인기, 불안한 당내 입지, 줄어드는 선거자금 같은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대선 후보 자격을 박탈당할지 모르는 문제가 다시 트럼프 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메릭 갈랜드(Merrick Garland) 미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18일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두 가지 수사를 더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잭 스미스(Jack Smith) 검사를 특별검사(special counsel)를 임명했습니다.
특검으로 가는 두 가지 수사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 수석 검사로 일하던 스미스 검사는 갈랜드 장관의 특검 임명과 함께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두 가지 수사를 지휘하게 됐습니다. 하나는 지난 2021년 1월 6일 미국 의사당을 점거한 폭도들의 테러에 관한 수사고, 다른 하나는 트럼프가 마라라고 자택으로 가져간 백악관 기밀문서에 관한 수사입니다.
2021년 1월 6일은 두 달 전 미국 유권자들이 투표한 결과를 의회가 최종 추인하는 날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은 채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믿은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를 추인하는 절차를 실력으로 저지하겠다며, 의사당으로 쳐들어갔습니다. 폭도와 이를 막아선 의사당 경비대, 경찰 가운데 사망자도 발생한 이날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됐습니다. 하원이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의사당 테러의 경위를 조사했고, 검찰도 그동안 테러에 가담한 이들, 배후에서 테러를 부추긴 이들을 전방위로 조사해 왔습니다.
또 다른 사건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택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알려진 백악관 기밀문서에 관한 수사입니다. 이미 연방수사국(FBI)이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의 마라라고 자택을 압수수색해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미스 특검은 두 가지 사건의 수사를 맡아 진행하며, 자신을 임명한 갈랜드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마녀사냥? 트럼프가 자초한 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곧바로 특검은 민주당과 워싱턴 엘리트들이 오랫동안 자신을 향해 벌여온 마녀사냥이자 정치적 쇼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자신이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는 것만이 부패한 기득권을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죠. 그러나 18일 갈랜드 장관의 발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법무부에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바이든 대통령도 재선에 도전할 것으로 알려진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관련 수사를 정치적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특별검사를 임명하는 일은 더욱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메릭 갈랜드 법무부 장관
트럼프는 두 가지 수사 결과에 따라 핵심 피의자로 기소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여전히 의사당 테러를 촉발한 문제의 주장, 즉 2020년 대선은 부정선거였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권토중래를 선언했습니다.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했고, 간첩 혐의까지 받을 수 있는 중대 범죄 피의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자기 입맛에 맞게 정해버리는 상황을 막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그때 가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될 것입니다.
갈랜드 장관은 더 늦기 전에 수사에 속도를 내고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특히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상 특검은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만약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지지한 후보들이 대승을 거두었다면, 특검 카드를 꺼내기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는 줄곧 자신을 향한 수사를 모두 정치 공세라며 헐뜯어 왔습니다. 민주당 내에서도 정파적인 선택으로 비추는 건 얻을 게 별로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0년 대선이 부정선거였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그대로 읊어대던 후보들이 중간선거에서 줄줄이 패배한 덕분에 갈랜드 장관은 부담 없이 정공법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잭 스미스와 메릭 갈랜드
특별검사 임명 관련 뉴스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두 명의 인물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메릭 갈랜드 법무부 장관과 잭 스미스 특별검사입니다.
잭 스미스 특별검사는 정치적 부패 관련 수사에 잔뼈가 굵으며, 전쟁범죄를 기소하는 검사로도 주요 경력을 쌓은 인물입니다. 그는 뉴욕 카운티 지방검찰, 뉴욕 동부지검을 거쳤으며, 2010년에는 법무부의 반부패 조사관으로 임명돼 30명 이상의 검사를 이끌며 부패와 선거법 위반 수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2015년부터 테네시주 중부지검에서 일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로 파견돼 수석검사로 일해 왔습니다.
미국은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의 역할을 겸합니다. 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일까지가 행정부 소속인 법무부의 일이고, 재판은 사법부인 법원의 몫입니다.
갈랜드 장관은 사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인 대법관에 지명됐던 인물입니다. 2016년 2월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이 갑자기 사망해 대법관 자리가 공석이 되자,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나라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D.C. 항소법원 판사였던 갈랜드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후보자를 검증하고 청문회를 열어 인준하는 건 상원의 몫입니다. 그런데 당시 상원 다수당이던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가 새로운 대법관의 인준 자체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대법관 자리를 채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4년 뒤 긴스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매코널 원내대표는 자기가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으며,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인사청문회를 속전속결로 진행합니다. 2020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2020년 초까지 D.C. 항소법원 판사로 일한 갈랜드는 2021년 3월, 바이든 행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됩니다. 이후 마라라고 자택 압수수색을 최종 승인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스미스 특별검사의 소임은 수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에 기소 여부에 관한 의견을 덧붙여 법무부 장관에게 제출하는 것까지입니다.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건 갈랜드 장관의 몫이라는 뜻이죠. 스미스 특검의 수사와 갈랜드 장관의 결단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권토중래를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