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수리남 바우테르서 전 대통령의 그림자

9월 21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올린 글입니다.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 관해 수리남 정부가 넷플릭스와 드라마 제작사를 상대로 법적 절차를 밟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창작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애꿎은 피해와 표현의 자유 등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각색하거나 창작한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이며, 주요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알려지면서 수리남의 내용 가운데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부터 창작인지를 둘러싼 기사들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 수리남 정부가 항의한 부분에 관해 역사적인 사실들을 몇 가지 짚어보려 합니다. 이 문제가 실제로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할지, 정말 법정까지 가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판단은 시청자/독자 여러분의 몫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글은 제 의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실제로 일어난 수리남의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훑어보려 합니다.

사진=넷플릭스

– 수리남은 마약 밀매의 온상이다?

드라마 “수리남”에서 2000년대 수리남은 콜롬비아산 코카인을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보급하는 중간 기착지로 묘사됩니다. 수리남 정부는 마약이 대량으로 유통되던 건 모두 과거의 일이며, 지금은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 마약 범죄가 한결 줄었다며, 드라마가 수리남을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했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 국가별 자료집과, CIA 월드 팩트북의 관련 구절을 찾아봤습니다.

먼저 국무부는 산하 국제 마약단속국(Bureau of International Narcotics and Law Enforcement Affairs)이 예의주시하는 국가, 지역에 수리남을 포함했습니다. 수리남 관련 페이지는 과제, 목표, 성과를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과제(Challenge)

수리남은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코카인이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퍼지는 중간 기착지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일부 코카인은 미국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수리남은 제도가 갖춰지지 않았고, 경제가 불안정한 탓에 범죄나 부패를 단속하고 억제하는 정부의 역량도 부족한 실정이다.

  • 목표(Goals)

미국은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더 안전한 수리남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국무부 산하 국제 마약단속국(INL)은 카리브해 연안국 안보협의체(CBSI, Caribbean Basin Security Initiative)를 통해 수리남 정부를 돕고 있다. 구체적인 목표는 수리남 내 마약 밀수, 밀매를 단속하는 일은 물론이고, 수리남 정부가 마약, 돈세탁, 금융 범죄를 강력히 단속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 성과(Accomplishments)

국무부 국제 마약단속국이 지원하는 UN의 국제 마약 범죄 단속 프로그램(CCP, UN Office on Drugs and Crime Container Control Programme)과 수리남 항만수사대(PCU, Port Control Unit)은 2019년 벨기에로 향하던 코카인 855kg을 적발, 압류했다. 2019년 한 해 국제 마약단속국의 지원을 받은 수리남 항만수사대는 총 3.155톤의 코카인을 압류했다. UN 국제 마약 범죄 단속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국무부 마약단속국은 수리남 항만수사대 등 관련 기관 직원들을 훈련하고, 기술을 지원하며 장비도 제공하고 있다.

CIA 월드 팩트북에도 국무부 홈페이지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수리남을 설명하는  마지막 항목에 “수리남은 남아메리카 코카인이 유럽, 미국, 아프리카 등지로 유통되는 기착지이며, 수리남 국내에서 마리화나가 소비되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둘 다 다분히 미국 중심적인 시각에서 쓴 자료이지만, 수리남이 적어도 최근까지 남아메리카 마약 밀매 루트에 포함됐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 걸로 보입니다.

데시 바우테르서 전 수리남 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 드라마 속 대통령도 실존 인물?

드라마에서는 수리남 대통령이 마약왕 전요환을 비호해 주고, 그 대가로 온갖 뇌물을 받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나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며, 가뜩이나 재정이 빈약한 정부에서 사리사욕만 채우는 부정부패의 상징 같은 인물로 그려지는 이 사람은 실제로 전직 대통령 데시 바우테르서(Dési Bouterse)를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바우테르서 전 대통령은 197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수리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바우테르서의 이력을 위키피디아와 2020년 수리남 대선에 관해 쓴 BBC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바우테르서는 군인 출신 정치인입니다. 1980년 2월 부사관 16인회(Groep van zestien)를 이끌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수리남 첫 민간 정부를 무너뜨렸고, 이후 1987년까지 수리남 최고 통치기구인 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으며 대통령을 군부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임명하는 등 사실상 최고 지도자로 군림합니다. 1982년에는 이른바 “12월의 학살”이 일어납니다. 기자, 변호사 등 청년 15명이 살해됐는데, 바우테르서는 훗날 군부를 비판하던 기자나 변호사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자 살인을 교사한 혐의로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바우테르서는 이 사건에 관해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작전에 직접 관여한 바가 없다며, 살인 교사 혐의를 줄곧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어 1990년에 한 차례 더 쿠데타를 배후에서 사주했던 바우테르서는 1999년 네덜란드 법원에서 코카인 474kg을 밀매한 혐의로 11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바우테르서가 출석하지 않은 궐석 재판에서 형이 선고됐고, 인터폴은 이후 바우테르서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받습니다. 바우테르서는 수리남을 벗어나면 인터폴에 체포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겁니다.

살인 교사, 마약 밀매 등 여러 혐의로 잇따라 기소되거나 형을 선고받을 때마다 바우테르서는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법원이 아니라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계속해서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이 노력은 결실을 보아 2010년에 바우테르서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수리남은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바우테르서가 이끄는 국민민주당(NDP)이 2010년 총선 이후 다수 연정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이후 10년 동안 바우테르서는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칩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법원에서 마약 밀매 혐의로 11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이므로, 인터폴이 발부받은 체포 영장은 여전히 유효했고, 바우테르서는 수리남 밖으로는 좀처럼 나가지 못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찬 산토키 현 수리남 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 현 대통령은 누구?

바우테르서 대통령이 임기를 다 채우기는 했지만, 무사히 마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임기 말인 2019년, 40여 년 전인 12월 학살 사건에 대해 수리남 군사법원이 마침내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바우테르서가 학살을 주도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20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바우테르서는 2020년 1월 항소한 바우테르서는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합니다. (20년 형을 선고하면서도 법원은 바우테르서를 구속하는 영장은 발부하지 않았습니다.)

12월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재판을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전 경찰청장이자 법무부 장관을 지낸 지금의 대통령 찬 산토키(Chan Santokhi)입니다. 산토키 대통령은 경찰청장, 법무부 장관 시절 12월 학살을 비롯해 바우테르서 군부 정권이 저지른 여러 범죄를 수사하는 데 주력했고, 자연히 바우테르서와 정적이 됩니다.

2011년 야당 진보개혁당(VHP, Vooruitstrevende Hervormings Partij)의 당수가 된 산토키는 2020년 선거에서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바우테르서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마두로, 니카라과, 리비아 등 좌파 독재 정권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한 반면, 자신에게 11년 형을 선고한 구 식민지 모국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내내 껄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산토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수리남 대통령으로서는 13년 만에 네덜란드를 방문해 관계 개선 의지를 천명했고, 미국과도 마약 단속이나 경제 지원 등을 연결 고리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국정원의 체포 작전, 어디까지가 실화?

드라마 속 전요환의 모티프가 된 조봉행을 수사했던 검사와의 인터뷰를 보면, 한국과 수리남 사이에 범죄인 인도 조약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유인해 체포하는 과정은 드라마와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우테르서 전 대통령의 위키피디아 페이지에는 아들 디노 바우테르서(Dino Bouterse)가 마약 밀매 혐의로 미국 마약단속국(DEA, 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에 체포되는 과정이 설명돼 있는데, 오히려 이 내용이 드라마의 플롯과 유사해 보여 소개합니다.

바우테르서 대통령의 아들 디노 바우테르서는 2005년 수리남 법원에서 마약 밀매, 무기 밀매, 고급 승용차 도난 혐의로 8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모범수로 일찍 형을 마치고 풀려났고, 수리남 정부는 그를 대테러 부서 책임자로 임명한다.

2013년 8월 29일, 디노 바우테르서는 파나마에서 외교관 여권으로 여행하던 중 미국 마약단속국에 체포됐다. 그의 신병은 미국 뉴욕으로 인도됐고, 이후 기소돼 2015년 3월, 1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혐의는 마약 밀매, 그리고 수리남에 헤즈볼라 군사 기지 설립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디노 바우테르서는 테러 단체를 도울 뜻은 전혀 없었고, 단지 돈을 벌 생각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바우테르서 체포 작전은 전 세계 여러 기관의 공조 아래 진행됐는데, 마약단속국 직원들은 헤즈볼라 단원과 멕시코의 마약 밀매상으로 위장해 바우테르서를 그리스, 파나마 등지에서 만나 마약 거래를 제안하며 그를 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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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퍼민트에서 주로 세계, 스포츠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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