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특성입니다. 영어 단어로는 “identity”가 정체성을 뜻하죠.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는 철학적인 질문이지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기술입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열기 위해 지문이나 얼굴을 이용하며, 인터넷으로 송금하기 위해서는 기억 속의 비밀번호를 이용합니다. 국가가 발행하는 신분증은 여전히 중요한 기술이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은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진이 발달한 것이 100년 남짓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일상에서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므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매우 다양한 정보를 사용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몇십 미터 밖에서도 걸음걸이만으로 그 친구를 알아봅니다. 문밖에서 나는 목소리로도 그 사람을 인식하지요. 물론 그 사람을 확인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얼굴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뇌에는 얼굴을 인식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런 외면적 요소 외에 우리가 생각하는 또 다른 정체성의 요소로 그 사람의 내면이 있습니다. 얼굴을 포함한 외모가 완벽하게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전과 다르게 행동하면 우리는 이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치매나 기억상실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바로 그런 두려움을 보여준 영화입니다.
진화론과 유전학을 필두로 한 현대 생물학의 발전은 궁극의 정체성, 곧 그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정보가 유전자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유전자가 강력한 것은 얼굴을 포함한 그 사람의 신체적 특징뿐 아니라 행동과 관련된 성격적 특징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전자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환경에 의해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후성 유전이나 체내 미생물의 차이에 의해, 그리고 성장 환경의 차이에 의해 외모도, 내면도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초기 유전자를 연구한 이들은 인간의 몇몇 특징이 역시 특정한 유전자에 의해 전달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남녀 성별을 결정하는 것이나 혈우병과 같은 특정한 병에 관해서는 사실이지만, 다른 대부분 특징에 관해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 연구는 사람의 키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변이가 10만 개 이상임을 발견했습니다. 곧 각각의 변이가 키에 미치는 영향은 1mm도 안 될 만큼 작으며, 이러한 변이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키를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특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특징에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며, 동시에 하나의 유전자는 수많은 특징에 관여합니다. 이를 옴니제닉(omnigenic) 모델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지요. 얼굴을 이루는 특징들은 매우 다양하며, 동시에 인간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얼굴이 매우 비슷한 두 사람이 있다면, 둘의 유전자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지난 8월 23일, 바로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연구소의 연구팀은 유전적으로 무관하지만, 얼굴이 매우 닮은 이들은 유전자 역시 유사하며, 키와 몸무게 같은 신체적 특성과 흡연 여부, 학력과 같은 행동적 특성 또한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서로 더 유사하게 나타났음을 보였습니다.
이 연구는 우리의 상식과도 일치합니다. 바로 관상이라는 개념이지요. 얼굴이 비슷한 이들이 비슷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경험이 그저 착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타고난 유전자가 전부는 아닙니다. 환경에 의해 발현이 조절되는 후성 유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링컨이 이야기한,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는 분명 그런 점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