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은 생명 현상을 생존과 번식의 두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곧 특정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특성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개체군 내에서 지배적인 특성이 됩니다. 이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을 굳이 고르자면 바로 번식일 것입니다. 생존 역시 번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이는 번식 이후 심지어 자신을 영양분으로 제공하는 생명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체의 생애 주기 중 번식 가능한 시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그들이 속한 생태계에 매우 큰 변화가 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체는 바로 인간입니다. 지난 1970년대 이후 인간의 2차 성징 시기, 곧 사춘기는 지속적으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는 그 시기가 10년마다 3개월씩 당겨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 19일 뉴욕타임스는 1990년대 처음 제기된 이 이론과 그 이유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소개했습니다.
이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1980년대 노스캐롤라이나의 듀크 대학에서 성폭력을 당한 소녀들을 연구하던 마샤 허먼 기든스 박사입니다. 허먼 기든스 박사는 가슴이 일찍 발달하는 소녀들이 성폭력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소녀들이 언제 사춘기가 시작되는지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직접 이를 조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0년 동안 1만 7천 명의 소녀를 조사한 결과, 그녀는 당시 알려져 있던 것보다 1년 더 빠른, 평균적으로 만 10세에 소녀들의 가슴이 발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혹은 소녀들에게 이 시기는 이보다 더 빠른 만 9세였습니다.
당시 의학계는 이 결과가 너무나 놀라워서 오히려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다양한 후속 연구가 이어졌고, 사춘기가 빨라지고 있으며 그 속도는 10년마다 3개월이라는 사실은 정설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유인원에서 현대인으로 진화한 것은 지난 수백만 년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발달양식이 이렇게 크게 바뀌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문제는 아직 그 원인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2021년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는 배고픔을 억제하는 지방세포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렙틴이 2차 성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곧, 비만과 빠른 사춘기의 관계는 데이터와 이론의 관점에서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만이 아닌 소녀들의 사춘기도 빨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9년 코펜하겐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들의 BMI가 199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사춘기가 1년 가까이 빨라졌음을 보였습니다. 이 연구를 수행한 줄 박사는 내분비 교란 물질의 하나이며, 장판에서 포장지에까지 널리 쓰이는 프탈레이트를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프탈레이트가 사춘기를 앞당긴다는 증거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스트레스나 생활방식의 변화도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성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사춘기는 빨리 찾아옵니다. 어머니에게 우울증 병력이 있거나 생물학적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사춘기는 빨리 찾아옵니다. 한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신체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사춘기 시기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어쨌건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사춘기가 빨라지는 것은 분명 매우 큰 변화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서 생명체는 자손을 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비만이 사춘기를 앞당기는 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저출산은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지요. 물론 경제가 발달한 국가에서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 때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화학물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환경 호르몬이 아닌 또 다른 물질이 인간을 괴롭히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난 50년 동안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했기에 아직 언급되지 않은 다른 이유도 여럿 생각나네요. 기후변화는 혹시 이유가 아닐까요? 평균 기온이 다른 나라들에서 사춘기가 언제 시작되는지 본다면 이 가설을 테스트할 수 있겠지요.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어떨까요? 역시 비교할 만한 나라들이 있을 겁니다. 소음, 자극적인 매체, 아니면 위생 가설이나 과보호, 혹은 미세먼지는 어떨까요?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사춘기가 지금의 속도로 무한정 앞당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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