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은 1973년 미국 대법원이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여성의 권리로 인정한 판례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판결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임신중단권을 지지하는 이들을 여성의 결정을 우선한다는 의미에서 ‘pro-choice’로, 태아의 생존권을 지지하는 이들을 ‘pro-life’라 부릅니다. 제가 미국에 있던 2010년경에도 이 주제는 캠퍼스와 정치권에서 중요한 이슈였고, 2022년 임신중단권의 금지 여부를 (연방정부가 아닌) 주정부가 판단하게 하려는 대법원의 판결이 예상됨에 따라 다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라면, 아니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문제가 결국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된 후 몇 주가 지난 태아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 대상이 분명한, 하나의 독립된 인간이라면 어떤 이의 철저한 보호와 책임하에 있다 하더라도 – 뱃속이라는 극단적인 조건으로도 – 임의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심한 장애인이나 수많은 기계 장비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이들의 생명도 같은 논리로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충분히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면 산모의 판단이나 신체적, 사회경제적 삶을 위해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가 충돌할 때 우리가 인간의 손을 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곧, 이 문제는 얼마 전 소개한 무척추동물의 감정 연구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여성에게 무한한 임신중단권을 준 것은 아닙니다. BBC는 지난 3일 기사에서 이 판결의 결과가 9개월의 임신 기간을 세 기간으로 나눈 후, 첫 3개월은 임신중절을 무조건 허용했고, 3~6개월에는 일부 정부의 규제를 허용했으며, 6~9개월에는 정부가 이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3개월, 6개월, 곧 12주와 24주라는 기준에 대해 지난 50년간의 과학 발전은 새로운 근거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은 방사선 전문의 그라치 포조 크리스티가 쓴 임신중절 금지를 지지하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그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난 1973년만 하더라도 초음파 기술이 발달하기 전이었으며, 1970년대 후반에야 사람들은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3D 초음파 기술로 단 15주 된 태아라도 발차기, 팔의 움직임, 심장이 뛰는 것을 볼 수 있고 얼굴 역시 자세히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곧 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가 더 어린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됐고, 그러므로 임신중절에 기본적으로 반대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생존 가능성 또한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산모의 몸 바깥에서도 마치 중병 환자처럼 의학 기술의 도움으로 생존을 유지하고 나아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태아를 낳지 않는 것이 어떤 권리를 빼앗는 것이라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야후에 실린 기사는 21주에 태어난 아이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태어난 아이로 기네스북에 실렸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존 능력이 인간성을 결정짓는다는 말은 다소 위험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곧, 생존능력이 뛰어나야 인간이고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도 그렇기 때문에 비인간적으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더 약한 인간일수록 사회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 주장처럼 들리지 않나요? 이런 관점에서는 어쩌다 pro-choice와 pro-life가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주장이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를 약자 보호와 개인의 자유 존중으로 바꾸면 왠지 진보와 보수가 뒤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의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존할 수 있는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라는 점도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에는 여성이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순간 정부가 태아를 가져가 정부 시설에서 키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다시 시간이 흐르고 아이 혹은 부모가 서로를 찾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 시대의 드라마 플롯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모든 수정과 출산 자체를 정부가 관리하는 공장에서 하게 된다는 것도 SF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입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자연 임신과 출산을 선택하는 소수의 집단이 있겠지요.
물론 임신중단을 지지하는 과학 결과들도 있습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지난 6일, 여성이 임신중단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될 경우, 여성의 건강과 경제적 지위가 악화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그 효과는 다른 주(state)로 임신중절 수술을 하러 갈 수 없는 저소득층 여성에게 더 크게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도 덧붙였습니다.
태아가 고통을 느끼는가도 중요한 과학적 주제입니다. 이번 판결에서 임신중단을 반대하는 진영에선 대뇌 피질이 없어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24주 이전의 태아도 고통을 느낀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가디언은 5월 8일, 이에 대해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기사로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UCL의 신경생물학 교수인 존 우드는 모든 진지한 과학자들은 태아가 24주까지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라 말합니다. 한편 고통에 관한 논문을 쓴 바 있는 싱가포르 국립대의 심리학자 더비셔는 자신이 임신중단에 찬성한다고 밝히면서도 사실 태아가 어떻게 느낄지를 아마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을 겁니다.
한편 시카고대학의 연구소장인 앱카리안은 태아는 수면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라 말합니다.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만으로는 태아가 언제 인간이 되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과학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위에서 보았듯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나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 아니면 적어도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중 어떤 것을 인간의 조건으로 규정할지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며, 과학은 다수의 인간이 인간의 조건에 대해 동의했을 때 그 조건이 언제 만족하는지를 그나마 말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고통, 생존, 생각과 같은 개념 역시 같은 방식으로, 곧 과학자 사회에서, 또 인간 사회에서 지식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하고 새롭게 정의됩니다. 그리고 때로 도덕과 무관한 방향으로, 기술은 그 자체로 수요가 존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 15주나 20주의 태아와 뇌파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임신중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크게 바뀔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태어나고 몇 달이 지난 아기라도 스스로 말을 하기 전까지는 아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니 생각을 하기는 하는 건지 알기 어렵지만 말이죠.